박정희는 명동 지하에 갇혀 있었다 … 열흘 뒤면 사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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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1949년 남로당 군사책을 맡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명동 옛 증권거래소의 1960년대 말 모습이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그 혐의로 사형을 판결받았지만, 이 건물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가 대통령에 오른 뒤 내세운 ‘자본시장 육성의 해’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라는 표어가 묘한 의미로 다가온다. [중앙포토] | |
영등포의 창고중대는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로 넘쳐났다. 내가 머물고 있던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지하 보호실에도 중요 혐의자들이 꽉 들어차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안일 당시 방첩과장은 그런 일의 흐름 중 가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 밑에서 보좌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김창룡 대위였다. 김 대위는 나중에 악명을 뒤집어쓰고 암살당하고 마는 인물이지만, 그의 업무 추진력은 아주 대단했다.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람을 불러서 조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때로는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었지만, 어쨌든 작업은 이 두 사람을 비롯한 조사팀의 노력으로 상당한 탄력을 받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이 발 빠르게 펼쳐지고 있던 1949년 초. 매우 추웠던 어느 날, 김 과장이 조용히 내 사무실에 들어섰던 것이다. 퇴근 무렵이었고, 그날 하루의 사무는 모두 끝을 맺은 상태였다. 조사 작업의 실무 책임자가 그런 즈음에 내 사무실에 찾아온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김 과장을 앉은 채 바라봤다. 그는 주춤거리면서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말을 해 보라”면서 그에게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나는 사무실 중간에 놓여 있던 응접세트 의자에 그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국장님, 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 동기 중에 박정희 소령이라고 있습니다. 혹시 그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의 반란 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만났던 박 소령의 얘기였다.
그는 남로당 군사 분야의 중요한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아 내가 있던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의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었다. 그는 이미 그 혐의가 밝혀져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였다. 박 소령은 곧 수색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집행은 약 10일 뒤로 대강 정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쳤던 박 소령의 처지를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조사를 내가 직접 진행했던 게 아니라서 상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떠올려지는 것은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늘 과묵한 표정으로 작전회의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박 소령의 모습이었다.
당시 박 소령과는 대화를 거의 나눠본 적이 없었고, 좌익 혐의로 불려 왔을 때도 대면한 채 조사를 벌인 경험이 없었던 터라 특별히 어떤 감회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참, 박정희 소령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됐었지’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스쳤다.
김안일(예비역 준장·1917~ ) | |
나는 잠자코 김 과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 과장은 “혐의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박 소령은 군 내부의 좌익 색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자신도 남로당에 가입한 점을 무척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한 번 살려줄 수 없겠습니까….”
남로당 군사책으로 혐의가 밝혀져 사형이 확정된 박 소령을 살리는 작업. 대한민국이 막 출범해 사법체계가 모두 갖춰진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중대한 판결을 받았던 박 소령을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 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파묻혔다. 김 소령의 말을 듣고 즉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김 과장의 표정이 매우 간절했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박 소령을 구명하기 위한 작업은 여러 경로로 펼쳐졌다. 그가 그만큼 인간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6·25전쟁이 터진 뒤 나와 늘 격렬한 전쟁 일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인물이 김점곤 예비역 소장이다. 그는 한때 춘천의 8연대에서 중대를 맡아 일하면서 박 소령을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또한 박 소령의 인물 됨됨이와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응준 육군 총참모장을 여러 번 찾아가 박 소령 구명을 탄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키는 내가 쥐고 있었다. 숙군 작업의 총책임자로서 나를 거치지 않으면 박 소령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안일 과장은 그 때문에 퇴근 무렵에 있던 나를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