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노재현의 시시각각] 아파트 옥상의 ‘빛 이기주의’

푸른물 2010. 5. 22. 09:03

노재현의 시시각각] 아파트 옥상의 ‘빛 이기주의’중앙일보 | 2010.05.21 00:20 + 크게보기

경기도의 한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간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집안이 온통 어수선한 가운데 새 집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잠을 청하려고 불을 껐는데도 이상하게 방안이 밝게 느껴졌다. 아직 커튼도 달지 못한 실내로 푸른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범인은 인근 아파트 단지 옥상의 조명이었다. 건물 꼭대기마다 초록색의 강렬한 빛으로 띠를 두르고 있었다. 저절로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저런 몰상식한 짓을 해놓았을까.

나는 화가 나지만, 그 아파트 주민들은 옥상 조명 덕에 일대의 랜드마크가 됐다며 자부심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초록 띠가 아파트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준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옥상(옥탑) 조명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주상복합건물이나 고층아파트의 꼭대기에 설치하는 화려한 대형 조명은 ‘왕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왕관 모양이 아니더라도 띠·물결·반원 등 온갖 형태에다 색깔도 붉고 푸르고 희고 노랗고…글자 그대로 형형색색(形形色色)이다.

내가 몸을 새로 의탁한 경기도의 신도시는 아직 곳곳이 공사판이다. 더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쑥쑥 들어설 예정이다. 그 많은 건물들이 저마다 랜드마크를 자처하며 옥상에 ‘왕관’과 ‘금테’를 두른 후의 밤 풍경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공유지의 비극’이니 ‘구성의 모순’이니 하는 말은 바로 이런 사태를 일컫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뿜어낸 빛이 남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 된다. 신도시의 밤하늘은 사람과 나무·새 등 모든 ‘주민’의 것이다. 밤하늘은 낮과 달라서 충분히 어두울 권리가 있다. 에너지 낭비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도 ‘왕관’이라니…. 그렇게 천박한 왕관도 있었나 싶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는 교회 부지도 있는데, 건물이 완공되면 십중팔구 다른 교회들처럼 붉은 십자가 조명이 밤하늘에 솟을 것이다. 전국의 그 많고 많은 붉은 조명에 더해서. 다른 더 세련된 신앙의 표현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결국은 배려와 인식 수준의 문제인데, 이게 현장에선 간단하지가 않다. 조명디자인 전문가 정미(이온 SLD 대표)씨는 최근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외부 조명 작업을 맡아 하면서 입주자단체와 무수히 입씨름을 벌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조명을 무조건 “더 밝게, 더 화려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피해를 안 주면서 은은하고 품격 있게 설계해야 ‘빛으로 표현하는 아파트 정체성(lighting identity)’이 구현되는 법이다. 우리는 아직 ‘번쩍거리면 다 금으로 착각하는’ 수준인 것 같다.

정부나 지자체가 나설 법도 한데 아직은 움직임이 미미하다. 시장·군수들이 공공건물의 휘황한 조명을 치적의 척도인 양 생각해 무조건 울긋불긋하게 꾸민 지역도 흔하다. 다행히 서울시가 지자체 중에서는 최초로 지난해 말 마련한 ‘빛 공해 방지 및 도시조명관리 조례안’이 지금 시의회에 상정돼 있다. 서울시내를 필요한 조명의 밝기 등급에 따라 6개 지역으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게 핵심이다. 처벌 조항을 못 넣은 게 흠이긴 하지만, 다음 달 시의회를 통과하면 아파트 옥상조명, 교차로 옥외광고판 등으로 인한 빛 공해를 예방하는 데 크게 도움될 듯하다. 서울시는 지난해에 발족한 ‘서울디자인위원회’를 통해 옥상 조명 등 야간 경관이 공해로 전락하지 않도록 행정지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국회 차원에서는 박영아(한나라당) 의원이 지난해 9월 대표발의한 ‘빛 공해 방지법안’이 특히 주목된다. 상위법으로서 지자체들의 관련 조례를 든든히 받쳐줄 이 법안은 그러나 상임위(환경노동위)에 상정만 된 채 아직 법안심사소위 한 번 못 열었다. 의원들, 특히 여야 지도부의 관심이 온통 딴 데만 쏠려 있었던 탓이다. 엄청난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러나 ‘빛 공해’처럼 작아 보이지만 사실은 커다란 문제에도 다들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