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1942∼ )

푸른물 2010. 5. 8. 10:39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1942∼ )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일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다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좋은 시가 갖춘 매력 중 하나는 단순성일 것이다. 이 시는 누구에게나 첫출발, 그 시작이 삶의 행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임을 일깨운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등 모든 처음들은 다만 제각각의 앞자리일 뿐인데, 이어져오는 삶까지 규정해버린다. 첫 자리가 운명의 고리가 되어 무수한 낱낱들을 한 줄로 꿰어놓는 까닭이다. 한때의 결정이 다음에 올 선택까지 좌우한다는 것은 운명의 가혹한 형벌, 고쳐 살 수 없는 엄혹한 현실이 어떤 처음도 회한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김명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