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4일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수상작으로 ‘내 운명의 별 김진규’가 선정됐다. 작가는 그의 아내 김보애. 영화배우였던 그녀는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등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가 어렵게 펜을 든 것은 남편 김진규의 인생을 재조명하기 위해서였다. 한때 깊은 상처를 주었던 대상에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녀의 관대함이 더 빛나 보였다.
올해로 일흔 둘. 그의 외모는 세월을 거스른 듯 주름 한 점 찾기 힘들었지만, 그의 깊은 눈은 열아홉 살 이후 단 한 번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고단한 삶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당대 최고 영화배우와 결혼, 그리고 13년 만에 이혼, 한정식집을 운영하며 네 명의 자녀를 키워낸 고단했던 중년, 병든 남편 김진규와 재회, 수백억 전 재산을 투자해 대북사업 지휘…. 그의 인생은 한 여인이 겪은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몇 권의 책으로도 다 못 채울 본인의 인생사를 정리해 ‘조선일보 논픽션대상’에 보냈다. 결과는 대상. 수상을 바랐다기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정리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결과였다.
남편 김진규를 생각하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그녀를 세 번 만났다. 만날 때마다 비록 과거 이야기지만 비밀스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잘 이야기한다 싶었는데, 사실 그건 많은 과정이 지나간 이후의 일이라 가능한 것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내내 눈물뿐이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참 눈물이 많았는데, 살기 바빠서 그런 건지 언제부턴가 눈물이 마르더라고요. 헌데, 이번 논픽션을 쓰면서 밤마다 울었습니다. 참 많이 힘들었겠다, 스스로 불쌍해서 울고,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불쌍해서 울고,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울고…. 그렇게 내내 울었습니다.”
김보애는 50, 60년대를 주름잡았던 영화배우 김진규의 부인이자 스스로도 유명 여배우였다. 그녀는 배우 생활에 한창 적응해가던 열아홉 나이에, 한 번의 결혼 실패 후 두 아들을 데리고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던 17년 연상 김진규와 결혼을 감행했다. 한 남자를 구원하고 싶다는 호기로운 생각으로 결정한 그 결혼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파란만장하게 만들어놓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정이 많았어요. 여고 시절, 등교하다가도 거리를 배회하는 어린 거지들을 보면 그냥 못 지나갔지요. 집으로 데려가 몸을 씻기고 밥을 먹인 후에야 학교를 가곤 했어요.”
김진규가 아내와 가정을 먼저 챙기는 성격이었다면 결혼생활이 순탄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집 세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그런 인물은 못 되었다. 거기에다 배우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던 김보애의 바람마저 결혼과 동시에 꺾어버린 탓에 김보애는 결혼생활 내내 응어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딸과 아들(진선, 진아, 리나, 근)까지 낳았으나 결혼 생활 13년 만인 1975년 결국 헤어지는 절차를 밟았다.
“제가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남편을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그는 술을 많이 먹었고, 손버릇도 안 좋았고, 여자관계도 복잡했죠. 내가 노련한 구석이 있었다면 남편을 잘 구스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이를 넷이나 키우는 것만 해도 너무 벅찼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삶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젊은 나이에 헤어진 김진규와는 20년 후에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김진규가 마지막 삶을 정리하던 시기였다.
정이 많은 것도 병이다
김진규는 영화제작자와 감독으로 활동하다 혈액암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998년 사망하기 전까지 말년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 김진규의 말년을 보살폈던 것도 바로 김보애다. 속이 깊은 사람. 그녀는 이혼한 후에도 자신과는 인연이 좋지 못했지만 네 명의 자식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을 정기적으로 아버지에게 보내 정이 끊어지지 않게 했고, 사업을 하던 김진규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그가 골수암으로 고생할 때는 마지막 가는 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재혼한 남자와도 이혼 절차를 밟았다.
“사람들은 늘 여자들이 따랐던 김진규를 두고 ‘행복한 남자’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불행한 남자였습니다. 인생을 통틀어 고통이 없었던 적이 없었어요. 그가 훌륭한 연기를 펼쳐 보인 것은 가슴속에 있는 고통이 우러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존경스러울 정도였어요. ‘벙어리 삼룡’을 찍을 땐 집에 와서도 벙어리 흉내를 냈고, 산에서 구르는 신을 대역 없이 직접 찍다가 허리를 크게 다쳐 평생 고생했어요. 이번 논픽션을 쓰기 위해 만났던, 이제는 고인이 된 유현목 감독도 ‘진짜 배우는 김진규 하나’라고 하셨지요. 그가 영화사에 남긴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김보애는 김진규가 배우로 한창 활약하던 시절의 동료들(최남현, 박암, 장동휘, 이민자, 박노식, 도금봉, 최무룡, 신상옥, 편거영, 임원식)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 과정은 곧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이기도 하다.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들었던 50~60년대, 당시에는 주연급 배우들조차 싸구려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촬영 현장에서 감독에게 두들겨 맞고, 제작자에게 끌려 다니다시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처럼 힘든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은, 고생스러웠어도 행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 김진규의 인생을 정리하다 보니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 스스로 영화배우 김진규에 대해 14년 세월을 부대끼며 살았던 남편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성하게 됐습니다.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영화인 김진규, 밤새 대본을 외우고 손수 화장을 하며 하루에도 몇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했던 그의 고뇌를 이제야 이해하게 됐습니다.”
김보애는 인터뷰 중에 ‘김진규예술관’을 건립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이전에는 막연히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논픽션 대상’을 위해 원고를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굳혔다고 한다. 특히,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막내 김근이 틈틈이 모아둔 아버지 자료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영화배우에 대한 인식이 관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화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고, 역사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만 관객이 드는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배우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게 무척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