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
―이상교(1949∼)
봉숭아 꽃물
빨강 꽃물
콩콩 찧어
손톱 위에 두고
열 손가락 끝
호호
무명실로 묶어두었다.
밤사이
꿈속에서 꿈을 깨어
풀어볼 때마다
그대로 흰 손톱
안타까운 흰 손톱.
눈뜨자 곧
풀어보았다.
손톱에 핀 봉숭아 꽃물
바알간 봉숭아 꽃물.
여름이 지날 무렵, 봉숭아꽃이 지기 전에 소녀들과 처녀들, 그리고 젊은 아낙들은 꽃밭에서 빨간 봉숭아 꽃잎을 따 모았다. 손톱에 봉숭아물 들이는 것은 우리나라 여인의 소중한 한 해 행사였다. 봉숭아 꽃잎을 콩콩 찧어 손톱 위에 소복이 올려놓고 봉숭아 이파리로 감싼 뒤 실로 묶는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일을 벌이기 마련인데, 손톱에 꽃물이 들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리기 때문이다. 꽃물이 더 진하게 들라고 꽃잎을 찧을 때 백반이나 숯을 빻아 넣기도 했다. 누이들과 그 친구들이 모여 작은 소란을 떨 때 주위를 어정거린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독자도 계실 테다. 누이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있는 어린 사내 동생에게 새끼손가락 하나에 봉숭아꽃잎을 싸매주기도 했을 테다.
열 손가락을 싸매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손톱에 어여쁜 물이 들어 있을 테다. 누구 손톱이 가장 예쁘게 물들었나가 화제가 될 테다. 잠버릇이 험해서 자는 동안 봉숭아꽃잎 싸맨 게 다 풀어져 버리면 어떡하지? 뭐가 잘못돼 손톱에 물이 들지 않았으면 어떡하지? 기대감과 걱정으로 두근두근한 소녀의 마음이 ‘손톱에 핀 봉숭아 꽃물/바알간 봉숭아 꽃물’처럼 예쁘게 그려진 동시다.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꽃물이 남아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우리나라 아가씨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세 번은 들여야 예쁘게 물이 든다고 지극정성으로 봉숭아꽃물을 들이던, 붉음이 짙어 검붉은 손톱으로 물들이던 정열의 아가씨들, 이제 고이 나이 드셨을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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