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로서 같은 시기에 활동한 김지미와 나는 다소 부담스런 사이였다.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1963년 영화 '77번 미스김'을 시작으로 약 40여 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고, 나는 나훈아의 공군 투서 사건을 통해 김지미와 나훈아의 관계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지미를 이야기할 때 그녀의 네 번째 남편 이종구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김지미는 홍성기 감독·최무룡·나훈아와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지만 이 박사는 세계적 심장내과 전문의로 내게는 친형과 같은 존재였다. 이 박사의 가족은 이북에서 대구로 피난을 왔으며, 이 박사의 동생 이봉구는 나와 경북고 동기였다.
유명한 비뇨기과 의사였던 이 박사의 아버지는 전쟁 통에 성병이 유행한 탓에 떼돈을 벌었다. 경북고 2학년 때 집이 몰락하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몰린 내게 사실상 학비를 대주신 분도 이 박사의 아버지였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돈이 될만한 책들을 들고 이 박사의 아버지를 찾아가 "학비 좀 주세요" 말하며 울었다. 그 분은 군말없이 그 책들을 사주셨다.

병원에서 만난 독일계 미국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둘 낳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이혼 수속을 밟고 서울 아산병원 심장센터 소장으로 취임했는데 김지미 어머니의 심장 치료를 맡았다가 김지미와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혁신적인 심장 수술법을 도입한 이 박사의 인기는 대단했다. 나는 김지미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한 동안 이 박사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이 박사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없는 내겐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신영(신성일 본명은 강신영(姜信永))아, 이 박사가 김지미 만난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해? 난 반대인데…."
"저도 반대입니다."
"그럼, 네가 이 박사 만나서 설득해라."
우리는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36층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이 박사는 대뜸 말했다.
"나, 김지미와 만나느라 바빴다. 우리 결혼할 거야."
당시 리즈 테일러가 몇 번째 결혼을 했다고 떠들석할 때였다.
"형님, 네 번째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미는 참 바쁘게 사는 여자야. 참 대단해"
이 박사는 요지부동이었다. 헤어진 후 이 박사 아버지는 어떻게 됐냐며 전화로 물어왔다. 난 반대했다고 말씀드렸다.
"이 박사가 그러는데, 네가 찬성했다고 하더라."
기가 막혔다. 이 박사의 눈에 콩깍지가 씐 것이었다. 곧 약혼식이 발표됐고, 김지미는 그 때부터 내게 등을 돌렸다.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김지미는 젊은 시절부터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았다. 한 30~40명쯤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식구를 다 먹여살렸다는 점에서 훌륭한 여인이다. 결국 이 박사와 김지미는 2002년 결혼생활을 정리했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