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특집 사회 프런트] 고령화 시대 농촌 주도권 남 → 여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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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전북 순창군 인계면 외양마을. 오후 9시 들판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밥상까지 물린 할머니 5~6명이 마을회관에 나와 TV를 보고 있다. 방 한쪽에는 노래방 기계에 자동 안마기·물리치료기까지 갖췄다. “할아버지들은 어디 갔나요”라는 물음에 “마을 회관이 우리들 차지가 된 지 몇 년째여. 할배들은 그림자도 없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몇 년 전만 해도 할아버지들의 놀이터였던 전북 순창군 구림면 방화리의 모정은 최근 할머니들 차지로 바뀌었다. 왼쪽에 혼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할머니들은 추석이나 돼야 남정네 목소리가 동네에 가득하다고 입을 모은다. [프리랜서 오종찬] | |
충남 서천군 비인면 관리1구 마을. 차령산맥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주민(86가구·177명)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65세 이상 주민 58명 가운데 남자는 17명(29%)에 불과하다. 할머니가 41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이 때문에 마을회관은 늘 할머니들 차지다. 할머니들은 거의 날마다 마을회관에 모여 화투도 치고 윷놀이 등을 하면서 소일한다. 신순례(78) 할머니는 “올 추석연휴 때는 젊은이들이 고향을 많이 찾아와 마을회관에 남자들 목소리로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요즘 농촌은 할머니들로 넘친다. 반면 할아버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남은 농촌일수록 여초(女超) 현상이 심각하다. 할머니 인구비율이 높아지면서 농촌의 주도권은 이미 할아버지에서 할머니로 넘어갔다.
국내 최고 장수고을로 알려진 순창군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군 인구 중 노인(65세 이상)은 8494명으로 전체 주민(3만179명)의 28%나 된다. 이 중 할머니가 5199명으로 61.2%를 차지한다. 할머니는 70~79세에서 59%, 80~89세 65%, 90~99세 79%로 급격하게 높아진다. 100세 이상 7명은 모두가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읍 지역을 벗어난 농촌마을로 갈수록 심각하다. 순창군 내 전체 330여 개 자연부락 중 50여 곳에서는 노인 10명 중 7명 이상이 할머니인 것으로 조사됐다. 85세 이상 조사에서는 120여 개 마을에서 할머니만 있고, 할아버지가 아예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북 임실군도 비슷하다. 65세 이상 노인이 현재 3만5060명 중 8843명(남자 3463명, 여자 5380명)으로 28.9%를 차지한다. 이 중 할머니가 5380명으로 60.8%였다. 80~89세는 할아버지 530명, 할머니 1074명이다. 90~99세는 할아버지 52명이지만, 할머니는 무려 158명이나 된다. 100세 이상인 6명은 모두가 할머니들이다.
농촌에서는 고령화 속에 남녀의 역전현상이 급속하게 진행 중이다. 우선 농사꾼이 남자에서 여자, 특히 60~70대의 할머니들로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요즘 들녘에서는 과거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퇴비내기·풀베기·농약뿌리기는 물론 경운기 운전까지 척척 해내는 할머니 농군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임월선(73·순창군 금과면 수양리) 할머니는 “경운기 몰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열 마지기 농사를 짓는다. 농약통 짊어지고 들판에 나가는 것도 웬만한 건 내가 다 한다. 트랙터·콤바인 등 큰 기계가 필요할 때만 젊은 이웃들에게 부탁한다. 두 살 많은 남편은 물꼬관리나 고추따기·소 돌보기 등 가벼운 일만 한다”고 말했다.
17일 오전 충남 서천군 종천면에 있는 군 노인복지관에서 할머니들이 당구를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 |
면민의 날 등 주요 행사의 주인공도 할머니들이다. 참석자 중 할머니들이 많기 때문이다. 순창군 유등면은 다음 달 면민의 날 행사를 노인 공굴리기, 투호, 고리걸기 등 할머니 경기 위주로 짰다. 게이트볼 등 면 대표 운동선수를 뽑는 데 할머니들이 없으면 아예 선수단을 구성하지 못할 정도다. 순창군 쌍치마을 이장 박종성씨는 “마을 대소사를 결정할 때는 가장 먼저 마을회관의 할머니들을 찾아가 상의한다”고 털어놓았다.
마을의 중심세력이 교체되면서 반대로 할아버지들은 설 공간을 잃어버렸다. 최근 순창군 구림면 화암리·구암리에서는 여름철이면 동네 주민들이 쉼터로 쓰는 모정(짚이나 억새로 지붕을 이은 정자)이 할머니들 차지가 되었다. 2~3년만 해도 모정을 독차지했던 할아버지들은 밀려나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지낸다.
농촌에 고령 여성들이 두드러지게 많은 것은 젊은 층의 이농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장년들이 취업·교육 문제로 도시로 떠나면서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할머니들은 식사·빨래 등을 스스로 해결하는 데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장수한다. 혼자 남은 경우 자립능력이 떨어지는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자식들을 따라 도시로 가지만, 할머니들은 농촌에서 사는 걸 택하는 경향이 있다.
농업패턴이 전통적인 쌀 농사에서 원예 중심으로 바뀌는 현상도 농촌세력의 교체를 부채질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적합한 비닐하우스나 채소, 원예농사가 할머니들이 구심점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전북대 양병우(농촌사회학) 교수는 “농업이 기계화·자동화되면서 남성 노동력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또 전통적인 쌀 농사 대신 원예농사가 유행하면서 여성들이 농촌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을 방치하면 머지않아 농촌 존재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 교수는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빠져나갔던 젊은 층이 전원생활이나 생태적인 삶을 찾아 농촌으로 U턴을 하게 돼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다소 완화되기도 한다”며 “이 같은 움직임을 촉진하기 위해 선진국에서처럼 귀농·촌하는 젊은이들에게 병역면제, 땅 무상임대 제공 등 혜택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장대석·황선윤·김방현 기자, [전국종합]
사진=프리랜서 오종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