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내 딸이 위험하다] 性범죄 99.4%가 '흐지부지'… "못 잡으니 신고도 안해"<

푸른물 2010. 8. 21. 05:13

내 딸이 위험하다] 性범죄 99.4%가 '흐지부지'… "못 잡으니 신고도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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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8.02 10:00 / 수정 : 2010.08.02 13:04

[내 딸이 위험하다] [上] 왜 이 지경까지
'원스톱 지원센터' 만들었지만… 피해자 아직도 불려다녀

① 수사력 턱없이 부족

지방도시에 사는 A(10)양은 방과 후 운동장에서 놀다가 작년 3~4월 세 차례에 걸쳐 학교가 고용한 60대 잡역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과자를 주며 김양을 꾀어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잡역부 숙소로 데려간 다음 욕심을 채우고 "부모에게 이르면 혼내주겠다"고 협박했다.

A양 부모는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딸을 타일러 뒤늦게 범행을 듣고 경찰에 신고했다. 일선 형사는 심드렁하게 "물증이 없으면 쉽지 않다"고 했고, 신고 후 며칠이 지나도록 가해자를 불러 조사하지 않았다. 경찰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학교측은 가해자를 해고하고 가해자가 머물던 숙소를 정리했다. A양 부모가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지만 교육청은 "경찰 수사를 기다리라"고만 했다.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A양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어린이·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사회문제로 대두될 때마다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세웠지만, 범인을 붙잡아 죗값을 물릴 수사력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강은영 부연구위원이 국내외 어린이·청소년 대상 성범죄 실태를 분석한 결과, 형량만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놨을 뿐 그 형량을 실제로 적용할 수사력은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 위원은 2007년 여성가족부가 전국 2만가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성범죄 피해 실태조사를 경찰 통계와 대조했다. 그 결과 강간·강제추행 사건 중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사건은 168건 중 1건꼴로 드러났다. 경찰에 신고된 사건 중 경찰·검찰 수사를 거쳐 법정까지 가는 경우(기소율)는 절반에도 못 미쳤고(45%), 법정까지 간 사건 중 유죄 판결이 난 사건은 10건 중 8건(82.8%) 정도였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강간·강제추행 450건이 발생할 때마다 단 한 건만 유죄 판결을 받고, 절대다수(447.3건·99.4%)는 경찰 조사조차 받지 않고 흐지부지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전자발찌·화학적 거세 등 수많은 처벌과 감시장치가 마련됐지만 '얼마나 강한 벌을 줄 수 있느냐'보다 실제로 유죄판결을 받는 범인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근본적인 대책은 '수사력 확충' 외에 없다는 이야기다.

2001년 당시 4살짜리 딸이 어린이집 사무장에게 성추행당한 뒤 생업을 전폐하고 5년간 법정 투쟁을 벌여 유죄 판결(징역 3년)을 받아낸 이영수(가명·38)씨는 "우울증에 빠졌던 딸이 대질심문 과정에서 가해자가 포승줄에 묶여 검사 사무실에 끌려오는 모습을 본 뒤 '나쁜 사람이 혼나서 좋다'고 상처를 털더라"고 전했다. 이씨는 "국가가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은 채 어떤 심리 치료를 해봤자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며 "경찰이 범인을 확실히 잡아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신고율도 올라간다"고 했다.


② 피해자에 '오라 가라'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유치원생 C(6)양은 작년 6월 시무룩한 얼굴로 "엄마, 수영장 안 가면 안 돼?" 했다. C양 어머니(39)가 이유를 묻자, C양은 온몸이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관장님(유아스포츠단 수영강사)이 수영복 속에 손을 넣어 아프게 한다"고 했다.

C양 어머니는 가해자를 고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는 형량을 줄이기 위해 C양 가족에게 합의해 달라고 졸랐다. C양 어머니는 합의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담당 검사로부터 '합의하지 않으면 판사가 법정에 C양을 증인으로 부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을 듣고 고민 끝에 합의해줬다.

서울 보라매병원 내 '보라매원스톱지원센터'. 경찰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한번만 진술할 수 있도록 전국 18개 원스톱센터에 진술 녹화 시설을 마련했지만 피해자가 검찰·법원에 불려나가는 일은 여전히 적지 않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2010년 8월 현재 성범죄 피해자 진술녹화 시설을 갖춘 기관은 전국 18개 원스톱지원센터(경찰 운영)와 10개 해바라기센터(여성가족부 운영)가 있다. 진술녹화 제도는 성범죄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에 여러 차례 불려다니느라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피해자들이 진술녹화를 한 뒤에도 검찰법원에 불려다니고 있다. 검사는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려면 보강 수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판사는 "한 사람(가해자)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판결이라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부르기 때문이다.

C양 어머니는 "아이가 내게 '관장님을 혼내 달라'고 말해 큰맘 먹고 고소했지만, 차마 아이를 법정에 세우는 일만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C양 가족이 합의해준 덕분에 가해자는 지난 6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가해자와 도로 한동네에 살게 된 C양 가족은 지난달 낯선 지방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겨 이사했다.

전문가들은 ▲법원이 어린이·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관한 한 문서로 된 조서 대신 '영상 조서'를 인정하고 ▲판사들과 사법연수원생들을 대상으로 성범죄 피해자를 배려하는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③ 어린이 性추행에 관대

지방도시에 사는 여중생 D양은 2008년 여름 집 근처 학원에서 돌아오다 20대 괴한에 의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갔다. 부모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담당 형사는 곧장 달려오는 대신 "성폭행이 아니고 성추행이라 강력사건 축에 못 낀다"며 수사를 미뤘다.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초등학생 E양의 부모도 지난해 집 근처에서 교복 차림 10대 2명에게 성추행당한 딸을 데리고 경찰에 갔다가 일선 형사로부터 "어차피 추행은 형량도 얼마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사건 발생 한 달 만에 E양 일가족을 경찰서에 부른 뒤, 비슷비슷한 용모에 청소년 10여명을 유리벽 저쪽에 세워놓고 "범인을 찍으라"고 했다. 주눅이 든 E양은 알리바이가 확실한 엉뚱한 학생을 용의자로 지목했고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한국아동성폭력피해자지원센터 송기운(38) 대표는 "어린이 대상 성범죄는 특성상 직접적인 성행위보다 유사성교나 추행이 많은데, 이 경우 피해자 진술과 기억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아 처벌이 쉽지 않다"며 "어린이들에 관한 한 성추행도 성폭행만큼 엄벌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한균 부연구위원은 "형법상 강간 개념을 '남성의 성기가 부녀자의 몸에 삽입된 경우'로 국한하는 나라는 한국일본 정도"라며 "서구 선진국은 남녀 구분 없이 성폭행 피해자로 인정하고, 삽입 개념도 훨씬 폭넓게 해석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