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태비, 그 천년의 교훈
![]() ![]() 2008/11/14 10:00 |
글쓴이 dalma5747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夫餘太妃)'의 묘지가 중국에서 남편 이옹과 함께 발견됐단다.
부여태비는 옛날 나당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공격하여 백제가 멸망(660년)한 뒤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의 증손녀로 당의 이옹과 결혼한 백제 여자이며, 이옹은 당(唐)의 현종의 아저씨 뻘 되는 황족으로 당인(唐人)이다. 또한 부여태비가 황족과 결혼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그동안 백제왕실의 후예들이 당나라에 끌려가 갖은 핍박을 받았다는 역사적 추측이 잘못됐음을 고증으로 확인해 준 셈이기도 하니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인데 대략 그 전문을 살펴보면
"남국(南國)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마음이 같았다." 라고 쓰여 있었단다. 뿐만 아니라 " 어질고 덕을 갖춰 행동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예를 갖췄기 때문에 군자의 집안 이라고 ...기록된 점 등을 보면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의 후예로 당 제후의 왕비가 된 "백제의 여인"이 이토록 아름다웠으니 부여태비의 인격적인 소양은 물론 얼마나 덕망을 갖춘 참신한 여자인지 금방 한눈에 가늠하고도 충분히 남을 것이다.
천년의 세월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살다간 지난날의 행실이 21세기 뭇세인들의 가슴에 불화살처럼 꽂혔으니 타락과 방종만을 일삼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뭇 크리라 여겨진다.
그렇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살다가 세상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오늘 갈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내일, 모레, 글피,
어떤 이는 3년후,
어떤 이는 7년후,
어떤 이는 15년후,
또 어떤 이는 20년 40년 후에 결국은 다 이슬처럼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곧 하루를 죽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살아 갈 여분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 줄은 모르나 너무 부귀영화 쫒아서 욕심내고 팍팍하게들 살지 마라.
부초같은 한세상 살아 탐할 것이 무엇이며 죽어 남길 것이 무엇 있겠는가.
결국 인생의 남는 것은 지난날의 살다간 바람의 흔적 뿐임을 저 말없는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지 않는가.
비록 하루를 살다 갈지라도 단풍 같은 미모의 저 부여태비처럼 다들 아침 햇살 같은 행실로 살아감에 죄 많이 짓지 말고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진정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다 떠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여태비 묘비석 中서 발견
기사입력 2008-11-14 03:19 |최종수정2008-11-14 09:07
[동아일보]
“단풍 같은 미모, 아침 햇살 같은 행실”
唐 황족과 결혼… ‘끌려가 핍박’ 추정 뒤집어
“백제 왕실 후손 행적-가계도 공백 메울 자료”
“남국(南國)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 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
백제 패망(660년) 뒤 중국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의 후예로 당 제후의 왕비가 된 ‘백제의 여인’이 이토록 아름다웠다.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夫餘太妃)의 묘지가 중국에서 발견됐다. 그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김영관(한국고대사) 청계천문화관 관장은 13일 “중국 산시 성 고고연구소가 2004년 중국 산시 성의 헌릉(당 고조의 무덤)에 딸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여태비와 남편 이옹의 묘지와 묘비석을 발견했다”며 “최근 묘지 비문의 글자 831자를 판독한 결과 부여태비의 생애와 의자왕 후손의 가계도를 밝혀냈다”고 말했다.
이옹은 당 현종의 아저씨뻘 황족으로, 부여태비가 황족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백제 왕실의 후손이 당으로 끌려가 핍박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잘못됐음이 드러났다고 김 관장은 설명했다.
비문에는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隆)의 손녀이자,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德璋)의 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옹은 당의 수도 장안 외곽의 영토를 다스렸던 제후 사괵왕(嗣괵王)이었으며 690년에 태어난 부여태비는 711년 이옹과 결혼했고 727년 이옹이 죽은 뒤 맏아들이 왕위를 잇자 태비로 책봉됐다. 부여덕장은 당나라에서 종5품 고위 관직을 지냈다.
비문에는 부여태비의 외모와 성품, 행실을 비롯해 부여태비가 이옹과 결혼한 뒤 집안을 일으킬 만큼 높은 덕성을 지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질고 아름다운 덕을 갖춰 행동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예를 갖췄기 때문에 군자의 집안 사람이라고…찬사를 보낸다. 또 부군이 괵국의 왕이 된 것은 (부여태비가) 집안에서 매우 잘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번 발견은 부여융과 그의 손자 부여경(敬) 정도만 알려진 백제 왕실 후손의 행적과 가계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다.
김 관장은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 맨 먼저 투항한 부여문사(文思) 외에 부여문선(文宣) 등 부여융의 아들이 더 있었다는 점도 드러났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15일 충북대에서 열리는 제1회 백제학회 정기발표회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을 발표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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