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과 이야기] '直指대모', 은사의 손자 서울대 총장(이장무) 만나다변희

푸른물 2010. 7. 17. 03:43

사람과 이야기] '直指대모', 은사의 손자 서울대 총장(이장무)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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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10 03:01

在佛학자 박병선 박사
대장암수술 마치고 기력 회복, 내달쯤 프랑스로 돌아간 뒤 병인양요 연구 등 마무리 계획
은사 故 이병도 사학과 교수, 외규장각 도서 찾는데 큰 역할
서울대 찾아가 '고마움' 전달… 투병땐 李총장 형제가 병실 찾아

9일 오후 서울대 총장실 앞에서 80대 할머니가 이장무(65) 서울대 총장 손을 덥석 잡더니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어쩌면 이렇게 할아버지를 닮았을까. 우리 이(병도) 교수님을 보는 듯 착각이 드네요."

할머니는 프랑스에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내 고증(考證)한 재불(在佛) 학자 박병선(82) 박사였다. 이 총장은 박 박사를 부축해 집무실로 안내했다. 이 총장이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직지심체요절 사본이 전시된 걸 보고 자랑스러웠다"며 "이게 다 박사님 덕분"이라고 말하자 박 박사는 쑥스러운 듯 웃음 지었다. 이 총장은 박 박사의 은사(恩師)인 고(故) 이병도(1896~1989)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손자다.

9일 서울대학교 총장실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재불(在佛) 학자 박병선 박사(사진 가운데)가 이장무 총장(맨 왼쪽)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박 박사는 198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재직하던 중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 문화재 반환 운동의 불씨를 댕겼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지난해 9월 병인양요 사료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온 박 박사는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서 치료를 해왔다.

지난 5월 마지막 수술을 마친 박 박사는 오는 8월 프랑스 파리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항암치료 때문에 거의 먹지 못해 살가죽이 뼈에 붙다시피 했고, 병상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했었다. 하지만 요즘엔 부축을 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입맛을 되찾아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그래도 6개월 정도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아직 할 일이 많다"며 파리행을 서둘렀다. 박 박사는 이날 한국을 떠나기 전 모교인 서울대를 찾아 투병하는 동안 도움을 준 이 총장을 만났다. 이 총장은 지난해 12월 박 박사가 치료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성금 1000만원과 화분을 보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두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박 박사는 1955년 27세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학위를 마친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이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빠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을 고증했다. 1980년에는 도서관 서고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 문화재 반환 운동의 불씨를 댕겼다. 도서관 일을 그만둔 박 박사는 외규장각 도서 연구와 프랑스에 남아있는 한국 독립운동 사료를 찾아내는 일을 계속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그는 파리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진 교외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박 박사가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데는 이 총장 할아버지인 이병도 교수 역할이 컸다. 이 교수는 유학을 떠나는 박 박사에게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조선의 물건을 많이 약탈해갔다. 사학을 공부한 사람이니 프랑스에 가거든 꼭 찾아보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왕실 물건이 있다는 얘기는 오갔지만, 그 실체는 알 수가 없었다. 박 박사는 "은사님의 보이지 않는 힘이 몇십 년 나를 지탱해준 것 같다"고 했다. 이 총장 동생인 이건무(62) 문화재청장도 지난해 12월 박 박사 투병 소식을 듣고 병실을 찾았다.

박 박사는 프랑스로 돌아가 병인양요 연구와 프랑스의 한국독립운동 연구 등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는 이미 프랑스에서 병인양요를 기록한 문서 1000여 장을 찾아냈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정치적 배경을 밝힌 책을 쓰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지식인들조차 병인양요나 외규장각 도서 약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이를 세계 학계에 널리 알려야 외규장각 도서 반환도 더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45분 만남 중 절반 이상을 외규장각 도서 소유권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이 총장은 "박 박사님은 여든이 넘었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이 청년보다 크고, 오랫동안 외국에 살았는데도 누구보다도 조국을 깊이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 박사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이장무 총장의 손을 잡으며 "이 교수님과 얼굴 생김새가 너무 똑같아 볼 때마다 놀란다"며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