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서소문 포럼] 마오쩌둥의 6.25 전쟁 60년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5. 26. 07:12

서소문 포럼] 마오쩌둥의 6.25 전쟁 60년 [중앙일보]

2010.03.24 00:02 입력 / 2010.03.24 10:07 수정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6·25 전쟁에 참전했다 숨진 것은 1950년 11월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뒤 두만강 부근까지 진격할 때였다. 당시 28세의 마오안잉은 평안북도 대유동 산중의 중국지원군사령부의 러시아어 통역관이었다.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 이하 요원들은 올빼미나 다름없었다. 낮에 방공호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미군기의 공중 폭격 때문이었다. 11월 24일, 김일성은 이들을 위해 달걀 한 꾸러미를 보냈다. 후퇴 길의 전장에서 찾기 힘든 음식이다. 25일 새벽, 마오안잉은 방공호 앞에서 그 달걀로 볶음밥을 만들려고 불을 피우다 폭사한다. 펑더화이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의 죽음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는 즉보됐지만 마오쩌둥에게 보고된 것은 한참 후였다. 마오안잉의 참전과 사망은 북·중 혈맹 관계의 한 상징이 되고 있다.

6·25는 중국 관점에서 보면 마오쩌둥의 전쟁이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서가 아니다.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조해서도 아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기치 하의 50년 10월 19일 중국군 참전은 그가 밀어붙여 이뤄졌다. 그해 8월 중국 지도부가 참전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한 이래 참전파는 마오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중국에 구원 요청 서한을 보낸 10월 1일부터 이틀간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조차 참전 구상은 부결됐다. 4일 다시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는 대논쟁에 휩싸였다. 의견 대립 형세는 1대 2대 7이었다. 적극 지지파는 마오 한 사람이었다. 저우언라이와 펑더화이는 태도가 분명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였다.

반대론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수십 년간의 전쟁을 벌인 신생 중국에 새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다(한계론) ②중국 국내에 있는 수백만 명의 국민당군 토벌이 우선이다(국내 우선론) ③미국이 전쟁을 중국 본토로 확대하면 새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위험론) ④공군과 해군이 열세여서 승산이 없다(패전론) ⑤병사들이 염전(厭戰) 분위기에 휩싸여 전장에 보낼 상황이 아니다(신중론). 참전 반대에는 미국을 두려워하는 심리(恐美病)도 한몫했다. 그 시기 소련의 공군 지원을 약속받지 못해 ‘1군 대 3군’의 전쟁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육군만 갖춘 중국이 미국의 육·해·공군에 대항한다는 자조였다.

그럼에도 대논쟁은 마오의 승리로 끝났다. 5일의 회의에서 즉각 참전 결의가 채택됐다. 미국이 한반도·대만·인도차이나를 통해 중국을 침략하는 전략을 세웠다(三路向心迂回)는 마오의 주장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 하지만 마오도 마지막까지 흔들렸다. 참전 날짜를 수차례나 바꾸었다. 중국의 참전 과정은 그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오가 한숨을 돌린 것은 51년 4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해임됐다는 소식을 듣고나서였다. 당시 마오의 측근은 “황제는 대만족(龍心大悅)”이라고 했다.(주젠룽, 『마오쩌둥의 조선전쟁』)

중국의 6·25 참전 과정은 중국에서 일고 있는 대북정책 논쟁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북한의 두 차례 핵실험과 급변사태 가능성 때문에 불거진 논쟁이다. 그 한 축은 대미 협조와 비핵화 쪽에 무게를 두는 전략주의자(strategist)다.

지난해 북한의 2차 핵실험 후 이들의 입김이 세졌다. 다른 하나는 북·중 동맹을 우선하는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다. 북한을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보는 사람들이다. 북한은 전략적 부담이 아닌 자산이라는 입장이다. 이들에게 대북 지원은 일종의 안보 보험이다. 겨냥점은 미국이다. 마오의 항미원조와 동전의 양면이다. 지금은 전통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방북 때 마오안잉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이제 조국은 강대국이 됐다”고 한 것은 이런 기류와 맞물려 있는지 모른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이미 북한의 급변사태 계획을 갖고 있다고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와 평화연구소(USIP) 합동보고서는 전한다(2008년 1월). 활동 범주는 세 가지다. 난민 지원과 같은 인도적 임무, 민간 경찰로서의 질서 유지, 핵 오염 제거를 위한 환경 통제라고 한다. 중국군이 인민군 복장으로 참전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6·25 전쟁 60년, 중국 참전 60년을 맞아 새삼 중국의 대북 전략을 주목해본다.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