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 이야기 듣고 자서전 써주는 경희대 모임
'짝꿍 어르신' 정해 봉사… "전쟁 이야기 들으니 저릿", "젊은 학생들 고마울 따름"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김은임(86) 할머니가 사는 단칸방에 대학생 3명이 모였다. 학생들은 녹음기를 켜고 수첩과 펜을 든 뒤 할머니와 문답했다."그럼 6·25 때 내려오셨어요?"
"아니야. 해방 후에 넘어와서 전쟁 때 논산으로 피란 갔지."
"이북에서는 어디 사셨는데요?"
"강원도 철원 근처였어."
- ▲ 김은임(86) 할머니의 지난 삶에 대해 취재하고 있는 경희대학교 사회봉사단원 학생들. 김지훈(21·왼쪽 두번째)씨는“가끔 부모님한테 털어놓기 힘든 여자 친구 문제는 인생 선배인 할머니·할아버지와 상담하기도 한다”며 웃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명예퇴직하고 아내와 이혼을 하니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울증에 걸려 자살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말하다 보니까 결국 '살자'라는 단어로 들렸다. 자살의 결론은 살자였다. 명언 중의 명언이라고 생각했다.'(박수재 할아버지 자서전 중)
'첫딸을 낳았는데 젖이 없어 암죽을 먹였어요. 볶은 쌀을 맷돌에 갈아 밥솥에 찐 뒤 사카린을 타면 암죽이 돼요. 요즘 사람들은 암죽을 잘 모르더군요.'(김명순 할머니 자서전 중)
학생들은 취재하듯 꾸준히 노인들을 찾았다.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추억을 공유해 좋고, 학생들은 값진 경험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엔 1회성 프로그램이었지만 올해부터 학교 차원의 정기행사로 자리잡았다.
학생들은 '짝꿍 어르신'을 정해 틈날 때마다 이야기를 듣는다. 김윤선(27)씨는 "채 30년도 안 산 내가 60년 넘게 사신 어르신들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고 했다. 깊숙한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어르신들과 강의실에서 친목게임을 하고, 홍릉수목원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이렇게 지난해 10월 아동가족학과 학생 6명이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 노인 12명의 자서전을 만들어주었다. 이어서 올해는 사회봉사단원 18명이 80세 이상인 홀로 사는 노인 6명을 2개월째 인터뷰하고 있다. 이유리(22)씨는 "전쟁 이야기는 빠짐없이 등장했다"며 "전쟁영화나 책을 좋아하는데 어르신들이 실제 겪은 이야기를 들으니 스릴 넘쳤다"고 했다.
작년에 노인 12명은 120페이지에 이르는 본인들 자서전을 전달받았다. 어린 시절 흑백사진,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창작시 등으로 엮은 소중한 기록집이다. 김명순(75) 할머니는 "평범하지만 고생하며 지낸 세월을 어떤 식으로건 남기고 싶었는데 자서전을 만들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김효순(67) 할머니는 "잠깐씩이지만 젊은 사람들과 같이 있어 좋았다"며 "황혼에 인생을 돌아보며 새 추억까지 만드니 행복했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회기동 이외에 동대문구의 다른 지역으로도 범위를 넓혀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