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작가' 박인식 부처의 길 따라 100일 동안 걷다][7·끝] 쿠시나가르, 그 열반의 길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4대 순례지'일러준 부처 사라수 밑에서 80년 생애 마쳐
1500㎞ 걸어 다다른 열반당 황금색 가사 두른 부처가… 걸음은 끌나도 길은 영원히
그러나 열반으로 가는 길은 이와 달랐다. 그 길은 갠지스강을 거슬러 오르며 자신의 몸을 한없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연어의 회귀(回歸) 본능과도 같았다.
부처는 바이샬리의 차팔라 언덕에 올라 자신이 석 달 뒤에 열반할 것을 예언한 뒤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 북서쪽으로 줄곧 걸어갔다. 이미 육신의 나이 여든에 이른 부처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이 갠지스강과 더불어 발원한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을 한 번만이라도 더 바라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가 29살까지 태자로 지낸 고향 카필라바스투에서는 북쪽으로 만년설 덮인 다울라기리의 하얀 이마가 지척으로 바라다보인다.
부처는 아난다와 몇 제자를 데리고 케사리아를 거쳐 차티하우라는 마을에 닿았다. 고향 카필라바스투를 불과 100여 ㎞남겨둔 지점이었다. 이 마을의 춘다라는 대장장이 아들이 부처 일행에게 정성껏 차린 음식을 공양했다. 그 음식에는 '스카라 맛다바'라는 요리가 섞여 있었는데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상해 있었다.
"춘다야, '스카라 맛다바'는 다른 비구들이 먹지 못하게 모두 내 상으로 가져오도록 해라."
그 춘다의 공양은 부처의 마지막 식사가 되고 말았다. 상을 물리자마자 격심한 식중독 증세를 보인 부처는 자신이 이미 열반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아채고는 시자(侍者) 아난다를 불렀다.
"여기서 가까운 쿠시나가르로 가자. 내 거기서 열반에 들리라."
- ▲ 구글 어스
그때 아난다가 부처에게 물었다.
"이제 열반에 드시면 남은 우리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걱정 마라. 그대들이 항상 기억하고 찾아봐야 할 네 곳이 있다. 내가 태어난 룸비니, 깨우침을 얻은 보드가야, 법의 바퀴를 처음 굴린 사르나트, 그리고 열반에 드는 이곳 쿠시나가르다. 이 네 곳을 순례하며 내 가르침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다시 만나 내 가르침을 따르는 것에 다름없다. 나는 늘 거기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대들을 기다리리라."
그러니까 불교의 4대 성지 순례는 부처가 마지막 가르침에서 직접 제자들에게 일러준 최고의 수행법이었던 것이다. 그 최후의 유훈(遺訓)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모든 것은 덧없다[諸行無常]. 다만 부지런히 힘써 끝없이 정진하라[不放逸精進]!"
3월 26일 사르나트를 떠났다. 쿠시나가르까지는 지도상 거리로 220㎞쯤 됐다. 여기서도 고속도로를 피해 농로로만 길을 이었다. 간지푸르와 라스라를 거쳐 벨트하라에서 다시 갠지스강 지류를 건넜다. 그리고 계속 북상하여 데오리아를 지나 쿠시나가르에는 4월 9일에 닿을 수 있었다. 연일 40도가 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300㎞ 거리를 걷는 데 보름 가까이 걸렸다.
- ▲ 쿠시나가르 열반당에 모셔져 있는 황금빛 가사를 두른 부처의 열반상. 5세기경 만들었다는 이 와불(臥佛)의 키는 약 6m에 이른다. /심병우 사진작가
그 길에서 나무는 곧 집이었다. 그 나무집으로 들어가 나뭇잎을 지붕 삼아 모기장 텐트를 치고 하룻밤 다리쉼 했다. 새에게 그렇듯 숲은 마을이었다. 그 숲과 숲 사이를 새처럼 옮겨 다니는데 쿠시나가르의 라마바르 스투파가 어느새 다가와 나그네를 맞았다. 쿠시나가르 들목에 있는 이 스투파는 부처의 다비 터에 세워졌다. 탑이라기보다 큰 동산 같았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은 단순한 형태의 이 탑은 부처 열반 뒤에 세워진 최초의 축조물이다. 불탑(佛塔)의 시원인 셈이다. 부처의 열반상(像)을 모신 열반당과 사리탑은 그곳에서 1.5㎞ 떨어진 사라수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1.5㎞는 단순한 공간으로서의 거리가 아니었다. 지난 100일간 룸비니에서 출발하여 보드가야와 사르나트를 거쳐 부처의 열반지까지 걸어온 농로(農路) 1500㎞의 마지막 1.5㎞였기 때문이다. 그 1.5㎞를 걸어가는 십여분 사이 내 머릿속에서 부처의 80년 생애가 두루마리 종이처럼 주르르 펼쳐졌다.
- ▲ 부처의 길을 따라 걸은 100일 도보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쿠시나가르를 약 4㎞ 앞둔 길 위에 선 박인식 작가. /심병우 사진작가
2500여년 전 부처는 바로 이 자리에 누워 마지막 법문을 남기고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부처는 내가 오는 것까지 알고 있었을까? 그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먼 길 떠났다가 스승의 부음을 듣고 급히 달려온 마하가섭이 관을 붙잡고 지금 나처럼 구슬피 울었다. 그러자 죽은 부처는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밀어 보였다. 맨발이었다.
그 맨발이 태어나고 깨달아 법의 바퀴를 굴리고 또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 열반의 땅에 이르는 1500㎞를 걸어온 나는 그 맨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를 댔다가 뺨으로 문질렀다. 그러다가 내 작은 맨발을 그 큰 맨발에 댔다.
나는 오늘의 이 영원한 하루를 위해 지난 100일 동안 몸과 마음의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 길은 불멸(不滅)의 꿈을 꾸게 했다. 자유의 몸뚱아리를 그 길에서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걸음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길은 영원했다. 길은 불멸을 기약했다. 길은 자유였다.
☞ 작가 박인식은
산악인, 미술평론가, 소설가다. 연세대 산악부 출신으로 ‘월간 산’ 등에 근무하다 1991년부터 네팔 히말라야, 천산산맥, 곤륜산맥, 유럽 알프스 등을 떠돌아다녔다. 산악소설 ‘백두대간’, 히말라야 순례기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산악인 평전 ‘사람의 산’ 등의 저서가 있다. 1951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