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누가 엿들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겨울바람처럼
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나가는 정경이 보입니다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최하림(1939~ )'달이 빈방으로'
해는 진실이나 죽음처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했던가. 그런데 달은 호젓이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어 정답다 여겼더니, 두려워라, 가득한 달빛이 일생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구나. 구차한 가구와 세간도 다 비우고 빈방만 하얗게 맨몸이 되어 마르는 기나긴 달밤을 어이 지새나.
김화영<시인>
시가 있는 아침] 최하림 `달이 빈방으로` [중앙일보]
2002.02.01 00:0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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