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

푸른물 2012. 11. 22. 08:57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김난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이병률),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공지영),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사랑외전`(이외수)….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어서면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위용 있게 자리잡은 책들이다. 20위권에 에세이만 무려 7권. 소설은 사라졌다. 시도 없다. 지난 10여 년간 출판계를 주름잡았던 자기계발서조차 밀어내버렸다. 이제 서점의 새로운 제왕은 에세이다.

광장처럼 넓은 이 서점에서 1평도 채 안되는 한국 에세이 신간 매대는 가장 붐비는 공간이다. 교보문고의 에세이 분야 판매율은 지난해 2009년 대비 11.8% 상승한 데 이어 올해는 10월까지 17.3% 치솟았다.

이러한 현상은 경박단소(輕薄短小) 시대의 증후(症候)다.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들만이 사랑받는 시대에 책이라고 예외일 순 없는 것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 일에 지친 고단한 심신을 가볍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책들이 사랑을 받는다.

에세이가 처음부터 이렇게 사랑 받아왔던 건 아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찬밥 신세였다. 2002년 가장 많이 팔린 책 30위권에는 에세이가 세 권, 그나마도 방송의 도움이 컸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27위)를 빼면 `서민 시인` 유용주의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8위)와 농부 전우익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17위)는 각각 2000년, 1993년 출간된 책이었다. 뒤늦게 주목받은 건 `느낌표 선정 도서`가 된 덕분이었다.

2003년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다.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와 전우익의 책 단 두 권. 2004년에는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9위에 올랐고, 법정의 `홀로 사는 즐거움`(21위)도 많이 읽혔다. 2005년에는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 권만이 13위에 올랐다. 2006년에도 법정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9위) 한 권이 목록에 올랐고, 2007년에는 전멸했다. 2008년에는 인기 소설가 이외수의 `하악하악`,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가 종합순위 2, 3위를 휩쓸만큼 많이 팔렸다.

에세이 시대 서막은 2009년 열렸다.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 장영희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10위권에 오르는 등 6권이 30위권에 올랐다. 2010년은 법정 스님의 책 5권이 무더기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7권이 30위권에 올랐다. 2011년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10여 년만에 에세이로는 처음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고, 6권이 3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올들어 에세이 바람은 더 강하게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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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인기 작가도 변해왔다. 지난 10여 년간 가장 사랑받은 수필 작가는 단연 법정이었다. 2000년대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한비야의 뒤를 이어서는 이외수, 공지영의 수필이 많이 팔렸다. 최근에는 김난도 서울대 교수와 시인 이병률이 뒤를 잇고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소설 시장이 죽었고, 삶이 불안하고 어려워지니 모두가 위로와 힐링 코드만 찾으면서 에세이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 같다"면서도 "디지털 문화가 범람하면서 사람들이 가볍고 찰나적인 것만 찾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에세이 전성시대는 소설가와 시인들의 마음도 돌려놓았다. 에세이는 문인들에게 오랫동안 본업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잡문(雜文)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저기 연재된 글을 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를 정해 써내는 에세이도 늘어나고 있다. 김연수는 달리기에 관한 애찬만을 담은 `지지 않는다는 말`을 펴냈고, 시인 오은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 `너랑 나랑 노랑`을 내기도 했다.

문인들의 에세이를 많이 펴내고 있는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는 "에세이는 독자들에게 시와 소설을 더 잘 이해하고, 작가들의 민낯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출판사들의 문인 섭외 경쟁도 치열해졌다"고 말했다. 60만부가 팔린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를 비롯해 19쇄를 찍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같은 인기 에세이집도 탄생했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 김영하의 `랄랄라 하우스`도 1만부를 넘겼다.

에세이는 독자와 가장 소통하기 좋은 장르이자 작가의 재능과 생각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편집이나 사진, 일러스트에 관한 의견이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중혁은 책속의 그림을 직접 그리고, 김영하와 이병률 등은 사진을 직접 찍어 책에 담고 있다.

좋으나 싫으나 다시 찾아온 에세이의 호시절, 진득하고 영롱한 문장이 향기를 피워내던 피천득처럼 문학성까지 갖춘 에세이의 탄생을 독자들은 고대한다.

[김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