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캠퍼스 DNA'가 달라졌다] [3] 몸만 커버린 '캥거루 대학생'
지난 25일 오후 8시 30분 서울 관악구 서림동(신림2동)의 한 고시학원 건물 앞에 230여명의 고시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9월 6일 시작되는 '사법시험 대비 진도별 모강(모의고사+강의)'을 신청하려고 80여m의 장사진을 쳤다. 이 중에는 고시생 아들 딸을 위해 대신 번호표를 받으러 온 40~50대 학부모들이 여럿 보였다.주부 박모(48·안양)씨는 명문 사립대 법대를 휴학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딸을 위해 오후 5시부터 기다렸다고 했다. 박씨는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열린 사시(司試)와 로스쿨 설명회 중 안 가 본 데가 없다"면서 "학원 관계자와 상담도 숱하게 했다"고 말했다. 권모(51·서울 노원구)씨는 인근 법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딸을 위해 저녁도 거른 채 1시간 30분 동안 딸 대신 줄을 섰다. 이들은 "번호표 좀 받아 달라"는 자식들의 말에 찜통더위 속에서 몇 시간을 버텼다. 수험 준비에 바쁜 자녀를 대신해 고시생 인터넷 카페를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하는 부모들도 있다.
- ▲ 지난 25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림동(신림2동)의 한 고시학원 앞에서 강의 접수 번호표를 받으려는 고시생들 틈에 나이 지긋한 학부모들이 끼어 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학원 정문 앞에 줄지어 앉아 기다리던 학부모(사진 위쪽)들은 오후 9시 학원 접수처에서 번호표를 발급받고 비로소 자리를 떴다(사진 아래쪽).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몸은 다 자란 성인이지만 하는 행동은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 공부만 하던 중·고교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피곤한 얼굴의 한 대학생 고시생은 "고등학교 때처럼 시키는 것만 하는 게 마음 편하다"고 했다. 또 다른 대학생 고시생은 "우리는 공부만 하고 정보는 엄마가 챙긴다"면서 "어릴 적부터 '분업(分業)'이 확실히 이뤄졌다"고 말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부모가 짜 놓은 '준비된 계획'에 따라 자격증이나 취업 대비 등 '새로운 입시'에 도전하는 대학생들이 많다. 이들은 '나만의 방식'으로 스스로 공부하기보다 누군가 짜 놓은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는 데 훨씬 익숙하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과 영어·음악·태권도 학원을 다녔고, 중·고교 때는 '엄마표 시간표'에 맞춰 언어·수리·외국어 학원을 드나들었다. 인강(인터넷 강의)도 엄마가 추천해준 대로 듣던 세대이다. 부모의 품에서 편안히 생활하던 10대 시절의 관성(慣性)을 20대가 됐지만 떨치지 못한 '캥거루 대학생'이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을 '위성 세대(satellite generation)'라고 불렀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원심력)가 있는 반면 엄청난 학자금 부담과 생활비 때문에 경제적·정신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려는 성향(구심력)도 강하다는 것이다. 고려대 김문조 교수는 "저(低)성장 시대에 접어들어 사회진출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 청소년 통계' 가운데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대한 항목을 보면 이런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20대 초반 응답자의 절대다수인 98.0%가 '자녀의 대학교육비를 부모가 지원해야 한다'고 답했다.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스스로 해결한다'는 응답 비율이 2002년 17.0%에서 2008년 13.8%로 뚝 떨어진 반면, '부모에게 의존한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동안 9.1%에서 17.3%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일선 교수들은 요즘 '캥거루 대학생'과 부모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다. "아이가 아파서 시험을 못 치를 것 같다며 선처를 부탁한다는 학부모가 있습니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부모가 연락을 하더군요." "아이가 대기업에 취업하려 하는데 F학점이 나왔다며 성적 올려달라고 집 앞까지 찾아오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일부 대학에서는 대학생 자녀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학부모를 학내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기도 한다. 연세대 의대는 지난 5월 학부모회 총회를 열고 학교 교육과정과 시설을 소개했다. 학부모 대의원은 100여명으로 1년에 한 번씩 정기총회에 참석하고 학부모들끼리 수시로 모임도 갖는다. 자녀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08년과 작년에 각각 1억원의 기부금을 냈다. 연세대는 학내 스타급 교수들이 학부모들에게 취업이나 유학, 자녀교육 방법뿐만 아니라 법률·부동산·건강·교양 등 문화강좌까지 제공하는 '학부모 대학'을 현재 3기까지 운영하고 있다. 경원대의 경우 소프트웨어설계·경영학과 김원 학과장이 지난달 25일 신입생 학부모 28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김 교수는 "학생들 진로와 학습 계획을 돕기 위해 학부모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