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아침논단] 세상 위해 한 명 희생 필요하다면이선애 변호사

푸른물 2010. 7. 23. 04:54

아침논단] 세상 위해 한 명 희생 필요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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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21 23:03

이선애 변호사

법치주의는 균형 찾기 세상 멸망 막기 위해
한 사람 희생이 필요할 때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지
즉답 못하고 망설인다면 그것이 균형 감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보리수'를 작곡한 슈베르트는 내성적인 성품이었으나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의 교류는 즐겼다고 한다. '슈베르티아덴'이란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모여 슈베르트가 작곡한 음악을 감상하는 모임을 가리킨다. 슈베르트는 새로운 친구가 모임에 오면 두꺼운 안경 너머로 쳐다보면서 "그 친구 뭘 좀 아나?" 하고 한마디 묻곤 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현재의 내가 슈베르티아덴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겨 본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슬로시티 운동은 '빠름'보다는 '자연·전통과 함께하는 느린 삶'을 추구하는 국제적 연대(連帶)운동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슬로시티 중 경남 하동군, 완도군 청산면을 방문하기도 했다. 슬로시티에 대한 자료, 강연들도 접하고 관계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하동의 야생차밭과 청산도의 돌담길은 고향의 노래가 들릴 것 같은 옛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현대인의 삶이 경제적 부(富)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면서 '빠르게' 살아온 것이 오히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에 터잡고 있다. 이 운동에서 추구하는 '느림'이란 음악의 빠르기로 말하자면 안단테가 아니라 원래의 보통 속도인 모데라토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느림'의 추구는 단순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생활패턴을 느리게 가져가자는 뜻도 아니다. 원래의 속도, 즉 자연의 속도에 인간이 맞추어 나가며, 지향하는 방향에 맞는 일을 하면서, 느리지만 잘해서(slowly but surely) 효과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과 전통을 보존한 지역사회가 아닌 대도시에서는 '느림의 생활화'를 누리려면 오히려 보다 더 빨라야 한다는 역설(逆說)에 부딪히게 된다. 더 빠르게 일을 마치고 시간을 확보해야 천천히 느끼는 휴식 속에서 멍하니 자신의 내면(內面)을 바라보면서 빈둥거리기, 한가로이 거닐면서 산책하기 등이 가능하다. 또 그것을 통해 세상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결국 세상 속에서 '빠름'과 '느림'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삶의 질은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균형점을 찾는 것이 질적인 수준을 좌우하는 것은 법치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헌법재판소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헌법 재판의 실무를 강의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헌법 재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다수와 소수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국민의 대의(代議) 기관인 국회가 다수결로 통과시킨 법률이 내용상의 정당성을 갖춘 정의로운 법률이 되려면 다수의 이익 내지 공익을 위해 소수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법률이 다수와 소수의 균형점을 잡지 못하여 소수의 기본권이 침해당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불균형은 헌법 재판을 통해 시정될 수 있다.

헌법 재판은 실질적 법치주의를 담보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헌법 재판을 구동시키는 원동력은 균형 감각이라고 설명하였고, 다음과 같은 간단한 비유를 들곤 하였다. 만일 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단 한 사람만 희생되면 된다고 할 때, 과연 그 한 사람에게 희생을 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즉답을 내리지 못하는 망설임이 있다면 균형 감각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공익과 소수의 기본권이 충돌하여 어느 쪽이 더 보호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순간에 항상 공익의 보호가 우선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감각을 갖춘다면 그것이 바로 균형감각이다. 언제나 공익이 소수에 우선한다는 공익 만능주의 생각으로는 불균형을 해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다수의 이익'과 '소수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을 수 있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법치주의의 질이 좌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