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서평]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 진경산수, 머릿속에 풍경

푸른물 2010. 6. 22. 06:02

서평]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 진경산수, 머릿속에 풍경 담고 붓은 그 기억에서 뻗어가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이태호 지음|생각의나무|551쪽|3만원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가 조선시대 화가들이 우리 땅을 그린 산수화와 실제 그 땅의 모습을 비교한 책을 냈다. 우리 화가들이 한국의 땅과 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같은 화가들이 구현한 진경산수(眞景山水)가 그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산수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적인' 화풍(畵風)도 탄생할 수 있었다.

이태호 교수의 전공은 조선시대 회화사로 그중에서도 진경산수에 대해 많은 논문을 발표해 왔다. 이들 논문에서 이 교수가 특히 주목한 것은 화가들의 '보는 방식'(視方式)이었다.

본래 회화란 삼차원의 물체를 이차원의 평면에 고착시키는 일이다. 더욱이 카메라가 없던 시절 화가들이 실경(實景)을 그리는 자세는 오늘날의 풍경화가와는 아주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이태호 교수는 '보고 그리기'와 '기억으로 그리기'의 두 가지 방식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단원이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을 그려온 '금강산 사군첩(四郡帖)'은 대표적인 '보고 그리기'다. 단원의 시방식은 카메라의 50㎜ 표준렌즈로 본 것과 같다. 기암절벽과 장쾌한 계곡의 표현은 사생(寫生) 풍의 스케치를 연상케 하는 일종의 정밀묘사다. 여기서는 풍광 자체의 실체감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조형적 목표로 된다.

'기억으로 그리기'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광각렌즈나 파노라마 카메라가 아니면 잡을 수 없는 시각구성을 보여준다. 이는 현장에 즉한 스케치가 아니라 기억에 의한 화면의 재구성임을 말해 준다. 실제로 겸재의 금강산 탐승에 동행했던 이병연은 "겸재는 붓도 없이 금강산에 들어갔다"고 했다.

'기억으로 그리기'는 조선시대 진경산수가 실경에 얽매이지 않고 화가의 조형 목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시점을 상하좌우로 이동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사경(寫景)산수라고 하지 않고 진경산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억으로 그리기'는 한발 더 나아가 '닮지 않게 그리기'로 발전하였다. 겸재의 '박연폭포'는 실제보다 네 배나 길게 과장하면서 감동적인 화면을 연출하고, 능호관 이인상의 '구룡폭포'는 모티브만 구룡폭포일 뿐 화면 구성은 갈필(渴筆)과 담묵(淡墨)의 변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장과 왜곡은 동양화론에서 "형상에 기초하면서 정신을 담아낸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미학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태호 교수는 옛 화가들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실체감 있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 비결은 부감법(俯瞰法)의 능숙한 구사에 있었음을 꼽는다. 겸재의 '금강전도'나 단원의 '도담삼봉' 같은 그림은 헬리콥터를 타고 보기 전에는 잡을 수 없는 앵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화가들은 마치 나는 새가 보는 듯한 시각으로 전체를 조망함으로써 실경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이것은 고지도에서 '읍성도(邑城圖)'를 그리는 기본원칙이 되었다.

이런 결론은 이 교수가 작품의 면밀한 분석과 함께 옛 그림의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얻어낸 것이다. 그는 30년 전에 진재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의 낱낱 현장을 찾아가 그림과 대조해 보면서 대개 35㎜ 렌즈로 포착한 시각과 같았음을 밝혀낸 이후 관련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

이 교수가 이 연구를 새 분야로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진경산수화라는 장르가 탄생한 계기였던 금강산을 1998년에 답사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 옛 그림을 통하여 금강산의 명승과 지리를 익혀 온 그는 현장에 가서는 풍광 자체보다 옛 그림이 먼저 떠오르는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그런데 내금강 만폭동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겸재 그림의 장면이 나타나지 않자 그것이 겸재의 '기억으로 그리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태호 교수는 진경산수뿐만 아니라 단원이 한국의 평범한 일상적 풍광을 어떻게 실체감 있게 표현해 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로 분석을 시도한다. 우리 땅의 상징적 수목인 소나무는 물론이고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달빛을 그리면서 향토적 시정을 담아낸 방식에 대해서도 논한다. 이런 시도는 회화사 연구가 보편적 사항에 대한 일반적 논고가 아니라 미세한 부분에 대한 심층적 탐구로 들어간 학문적 성숙을 보여준다.

이 책은 전에 없던 출판 형식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제1부는 진경산수화론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제2부에는 겸재 정선, 진재 김윤겸, 지우재 정수영, 단원 김홍도, 설탄 한시각, 동회 신익성 등 우리 땅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전문적인 작가론과 작품론이 실려 있다. 교양개설서의 역할을 하면서 학문적 성과도 담아낸 연구논문집인 셈이다. 여기에는 독자에게도 잘 읽히는 전문서를 펴내고자 하는 희망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이태호 지음/522쪽·3만 원 생각의나무

明이 망하자 조선 ‘진경산수’는 흥했다

 



단원 김홍도가 1788년에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그 연못을 그린 ‘구룡연도’(왼쪽). 풍경에서 받은 느낌과 감정을 중시한 겸재 정선과 달리 단원은 카메라로 찍은 듯한 사실적 화법으로 대상을 그렸다. 오른쪽은 구룡폭포의 실경. 사진 제공 생각의나무

 

 

수묵산수화는 유교 문예의 꽃이다. 맑은 심성을 지향하며 은둔과 풍류의 공간을 찾았던 조선의 문인들은 삶과 꿈을 붓끝에 실어 그렸다. 이 중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문인과 화가가 조선의 땅을 그린 점에서 당연한 것임에도 한국회화사에서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전의 산수화는 유교적 이상향을 중국에 두었던 문인들의 영향으로 중국의 땅과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1980년대부터 30년간 금강산부터 남도까지 조선 산수화의 실제 풍경을 찾아다니며 연구한 기록물이다.

15∼17세기 조선 전기 산수화는 중국 송·명대 화풍에 빠져 있었다. 당시 산수화풍을 대표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산언덕들은 중국 화베이() 지방의 험준한 지세를 연상시킨다. 저자는 “조선 전기에는 북송의 시인 소동파를 따라 마포 서쪽의 한강을 ‘서호(西)’라 부르고 그 동쪽은 ‘동호()’라 부를 정도로 강남열풍에 빠져 있었다”며 “문인과 화가들이 조선 땅을 그린 시점을 기준으로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이지만 진경의 화풍은 그 이전에 싹트고 있었다. 선조의 부마이자 시서()에 뛰어났던 문인 동회거사 신익성(1588∼1644)은 일찍이 진산수() 화론을 펼쳤다.

중화주의 쇠퇴로 ‘우리 땅’에 관심

 

독창적 화풍 완성 정선-김홍도 등
그림과 함께 설명

17세기 후반 현종·숙종 때에는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당대 화가 조세걸(1635∼?)은 1682년 성리학자 김수증의 은거지를 ‘곡운구곡도()’로 남겼다. 주희의 무이구곡이나 소동파의 서호 등을 선망하며 그림의 소재로 삼았던 이들이 자기 땅에서 학문과 예술을 구현하려 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조선의 문인이 조선의 땅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뀐 중국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숭명() 의식이 강했던 조선 문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소중화(), 조선중화()를 주창했다. 중국에 시선을 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념을 표방하며 조선 후기에 집권했던 세력이 서인(西) 노론()이었고 그들과 절친했던 숙종·영조 시절의 진경작가가 겸재였다. 그는 생활터전이었던 인왕산 백악 남산을 비롯해 여행지로 삼았던 금강산 등을 예술 대상으로 해 조선의 회화양식을 창출했다. 풍경을 부감해 재구성하는 구도뿐만 아니라 붓끝을 반복해서 찍는 미점준(준), 한손에 붓을 두 자루 쥐고 그리는 양필법() 등을 창안했다.

겸재는 대상을 과장하고 재구성하는 변형화법으로 독창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묘사보다 현장에서 느꼈을 법한 감명을 표현했고 행태를 그리면서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1751년 작품인 ‘인왕제색도()’ 외에는 겸재의 진경이 실제 풍광과 다른 경우가 많다”며 “이는 조선의 풍광을 그리면서도 선경()의 의미가 내포된 성리학적 이상을 그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18세기 후반의 단원 김홍도(1745∼?)는 정선의 부감시() 방식과 달리 화가가 서 있는 위치에서 바라본 형상을 화폭에 담는 방식을 완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1795년 작인 해금강의 ‘총석정도()’에 사실주의적 화풍이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단원의 진경작품 속 현장에 서 보면 그림과 동일한 구도가 그대로 잡혀 마치 카메라 오브스쿠라(외부 화면을 안으로 비추는 암실 형태의 장치)를 사용한 것 같은 인상이 든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경을 중시한 조선 후기 화풍이 그대로 살아남지 못하고 이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와 같이 실상보다는 심상을 표출하는 남종문인화풍으로 흐른 것을 아쉬워한다.

1998년 금강산을 직접 다녀온 저자는 겸재의 진경작품이 왜 실경과 닮지 않았나에 대한 해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실경과 닮지 않은 변형화법은 ‘체험하는 지각’인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풍경이 내 속에서 생각한다’는 말을 남긴 프랑스 인상파 화가 폴 세잔과 비슷하게 정선은 자연의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선과 김홍도뿐만 아니라 겸재 일파의 선도작가 진재 김윤겸(1711∼1775), 개성적인 사생화가였던 지우재 정수영(1743∼1831) 등을 통해 조선의 산수화풍을 훑어준다. 지금까지 썼던 논문을 기반으로 책을 엮어 구성이 거친 것이 아쉽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조선시대의 화풍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

‘겸재 정선’(최완수 지음·현암사·2009년)이 있다.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으로 있는 저자가 겸재에 대한 연구성과를 망라해 세 권으로 엮었다. 겸재가 살았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 그가 교유했던 당대 문인들에 대한 일화와 그 작품까지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산수화’(고연희 지음·돌베개·2007년)는 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가 서술한 산수화 개설서다. 회화 표현형식을 넘어서 시대적 역사적 배경까지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세속의 욕망이 담긴 민화산수도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2’(오주석 지음·솔·2005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안견 윤두서 정선 등 화가 9명의 명화 12점을 충실하게 해석하고 있는 예술교양서다. 그림과 관련한 수많은 일화 및 화가의 삶과 사상 등을 풍부하게 담았다.

 

선조들이 그린 우리 산하 거닐어볼까
한겨레 석진환 기자기자블로그
»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이태호 지음/
생각의 나무·3만원
 

미술사학자인 지은이 이태호 교수는 2년 전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라는 책을 통해 조선시대 초상화를 소개한 바 있다. 옛 화가들은 조선 개국 때부터 ‘터럭 하나까지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는 신념으로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의 초상화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그림 속 인물과 달리 얼굴의 검은 반점과 마마자국, 백반증까지도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이런 정교한 붓질로 인물의 삶과 사상까지도 담아내려 했다.

 

지은이는 ‘우리 얼굴’에 이어 이번엔 옛 그림 속 ‘우리 땅’으로 안내한다. 옛 산수화의 화폭에 우리의 강산이 어떻게 표현됐는지, 우리 땅을 그리는 방식은 어떻게 변해갔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살핀다. 시기별, 화가별로 구분된 친절하고 입체적인 분석도 뒤따른다.

 

옛 그림 속 우리 땅 기행의 출발지는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 정선’이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활동했던 겸재에서 기행을 시작하는 ‘심오하고 학문적인’ 이유는 없다. 그 전부터 사실 묘사에 충실했던 초상화와 달리, 산수화는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땅을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그 이유를 ‘성리학적 전통을 중시하고, 중국의 문화와 산하를 동경했던 조선 전기의 분위기’로 설명한다. 명나라가 무너진 뒤 조선의 선비들이 자기 땅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 전까지는,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을 동경하고 은둔과 풍류를 찬양하는 수묵산수화가 주류였다.

 

머릿속 관념적인 풍경에서 벗어나 우리 땅의 구체적인 풍경을 그린 화가가 바로 겸재다. 겸재의 이런 ‘진경’(眞景) 화풍은 이후 김윤겸, 정수영, 김홍도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들뿐 아니라 20세기 이상범이나 변관식, 이응노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진경’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화가들마다 ‘결’의 차이는 분명했다. 겸재는 금강산을 많이 그렸는데, 그는 금강산의 토산과 바위산, 계곡과 사찰 등을 수없이 다녔다. 그리고 다녀온 ‘기억’으로 그렸다. 그래서 그의 <풍악내산총람> 등은 마치 지도를 보듯 자세하지만, “실제와 같지 않다”는 당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후대의 단원 김홍도는 ‘마치 일정한 격식으로 풍경을 찍은 것 같은’ 금강산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기억’에 의존한 게 아니라, 현장에 앉아 그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은이는 산수화 외에도 옛 지도 역시 우리 땅을 그린 예술작품으로 소개한다.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는 지도에 산맥의 흐름을 표시할 때 독특한 회화적 요소를 도입했다. “대동여지도는 국토의 대서사시를 읽는 서정이 느껴지는, 장쾌한 예술작품”이라는 게 지은이의 평가다.
 

‘발품’을 팔아 우리 땅을 직접 보고 그린 화가들을 소개하기 위해 지은이 스스로 전국을 누빈 ‘발품’ 또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지난 30년 동안 금강산부터 남도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산수화에 등장하는 실제 풍경을 답사한 결과가 오롯이 담겨 있다. 옛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을 법한 위치를 찾아내 사진을 찍고,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옛 그림 150여점과 나란히 놓았다. ‘이곳을 이렇게 그렸구나.’ 몇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옛 화가들의 시선과 솜씨를 음미하는 재미가 작지 않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