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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들은 “그리스와 스페인은 유로화의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독자 통화를 가졌다면 쉽게 위기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다. 환율이 오르면 무역흑자를 통해 간단히 해결된다는 이런 논리는, 전혀 믿을 게 못 된다. 사실은 정반대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 환율이 치솟자 무역흑자보다 외채 위기가 먼저 찾아왔다. 그리스의 외채는 세계 21위, 스페인은 8위다. 경제 규모에 비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유로화라는 안전망이 없었다면 훨씬 심각한 사태를 맞았을 게 분명하다.
위안화를 놓고도 입씨름만 거듭되고 있다. 미 상원의 찰스 슈머 민주당 의원은 “위안화 환율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힘과 압력이라 믿는다”며 새로운 법안을 제출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대표적인 매파다. 뉴욕 타임스 칼럼을 통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야 하며 미 국채를 투매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팔기에는 너무 많은 미 국채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이다(too big to sell). 결국 중국의 손해라는 결론이다. 설령 미 국채가 쏟아져도 저금리를 유지하려는 미 연방준비은행(FRB)의 의지 덕분에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크루그먼은 오히려 중국의 미 국채 매각이 좋은 일이라고 단언한다. 달러화 가치가 낮아져 미국의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1928년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당시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이던 프랑스는 영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졌다. 미국이 부상하면서 영국의 스털링화는 맥을 추지 못했다. 이후 4년간 프랑스는 스털링화 자산을 무더기로 처분했다. 손절매가 손절매를 불렀다. 프랑스의 손해도 막대했지만 영국은 치명상을 입었다. 스털링화 가치는 폭락했고 영국은 세계 기축통화국에서 밀려났다.
미국과 중국의 정면대결을 부추기는 것은 한마디로 모험주의다. 중국이 고분고분 당할 리는 만무하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다른 나라의 환율을 강제적으로 압박해선 안 된다”고 받아쳤다. 슬슬 미 국채 보유 규모도 줄여가고 있다. 중국이 환율협상에 소극적인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12월 코펜하겐 기후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국장급을 협상대표로 내보내 지구전을 폈다.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뭐냐”는 질문에 중국 측은 “아직 본국에서 정확한 훈령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닳아서….” 세계 최대 휴대전화 생산국인 중국 협상 실무자의 답변이었다.
모두 견지망월(見指忘月)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다. 가리키는 달은 안 보고 저마다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 미국은 월가의 탐욕을 비난하다 중국 위안화로 방향을 틀고 있다. 경기회복이 신통치 않자 새로운 희생양 찾기에 나선 느낌이다. 헤지펀드를 걸고 넘어지는 그리스도 마찬가지다. 경제위기로 인한 정치적 책임을 떠넘기려는 몸부림이다. 미·중의 경제 갈등 역시 불길하다. ‘표범의 꼬리는 잡지 마라. 만약 잡았다면 놓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양국이 꼬리를 잡고 맞붙기 시작하면 언제 전면전으로 치달을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라도 달을 쳐다봐야 할 것이다. 남의 칭찬이나 손가락질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판단을 서두르면 후회도 빠른 법이다. 독자적인 출구전략을 세워 제 갈 길을 가는 게 최선이다. 미·중의 경제갈등 또한 언제 한국에 불똥이 튈지 모른다. 거리를 두고 신중하게 지켜볼 사안이다. 원래 그림과 전쟁은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