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레드카펫 밟은 윤여정… 현지 언론 "압도적 연기" 칭찬
"주연하다 조연으로 내려가니 비참 그걸 잘 견디면 철학자가 되죠"
- ▲ 칸 영화제에 도착해 사진기자들 앞에 선 윤여정. 그녀는“재미있게 즐기려고 왔는데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 때문에 봉변을 당하고 있다”며 웃었다. /로이터
―칸 레드 카펫에 선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살다 보니 죽기 전에 좋은 일이 생기나 보다 하는 거죠. '하녀'로 왔으니까 소감이 남다르긴 해요. 1970년에 김기영 감독님 '화녀' 주인공으로 영화 데뷔했으니까요.('화녀'는 김 감독이 자신의 1960년작 '하녀'를 변형해 만든 작품) 어떤 배우가 40년 전에 출연했던 작품 리메이크에 또 나올 수 있겠어요."
―감독님 생각이 나겠군요.
"김 감독님이 너무 일찍 태어나신 거죠. 좀 늦게 태어났으면 벌써 칸에 와서 황금종려상도 받았을 텐데."
―좀 더 늦게 태어났다면 하는 건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겠죠.
"(웃으며) 배우가 마흔, 쉰 넘어갈 때 제일 힘들어요. 주연에서 조연으로 내려가니까 비참하고 힘들어요. 그걸 잘 견뎌내면 철학자가 되고 '난 주인공이야'하고 버티면 딴따라가 되는 거예요. 인생도 페이드 아웃(fade out)하잖아요. 이 나이에 '(전)도연이보다 잘할 수 있는데' 하면 흉하잖아. 노욕(老慾)이잖아."
칸 현지서 발행되는 영화일간지 '할리우드 리포터'는 윤여정에 대해 "영화 속 가장 복잡한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였다"고 칭찬했다. 윤여정은 감독과 전도연에게 공을 돌렸다. "임상수 감독이 연출을 잘했다는 뜻이겠죠. 어릴 때는 감독과 논쟁하는 게 잘하는 건 줄 알았는데 도연이 보니까, 감독이 죽으라고 하면 죽겠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내가 쟤만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배웠습니다."
―영화 대사처럼 연기 인생에도 '아더메치한(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일이 있었겠죠.
"제가 젊을 때 한 10년 미국 사느라고 연기를 쉬었잖아요. 85년에 돌아와 보니 제가 떠날 때 노바디(nobody)였던 후배가 유명해져서 저한테 연기를 가르치더라고요. '아더메치'가 아니라 혀를 깨물고 죽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또 견디고 연습을 한 거죠. 결국 인생은 모두 내 탓이라고 해야 풀리는 것 같아요."
―홍상수 감독 영화엔 어떻게 출연했습니까.
"원래 '밤과 낮'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취소됐어요. 이번엔 딱 하루만 찍자고 했는데, 통영에 열 번이나 내려갔지 뭐야. (눈을 흘기며) 게다가 무료출연이잖아. 홍 감독 영화에 엄마 역할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이 남자가 이제 좀 나이드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아마 '하하하'의 내 연기 중 일부는 분명히 홍 감독 엄마 모습일 거예요."
윤여정은 듣던 대로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표현처럼 '(안내전화) 114도 알아듣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늙는다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에요. '아름답게 늙는다'는 건 개수작이라고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하고 똑같아. 안 되는 일이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할머니 역할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며 "저 여자처럼 늙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이미 그런 역할을 했음을 아는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