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가수 인생 담은 에세이집 낸 하춘화씨
하춘화씨는 50대에도 변치 않는 미모에 대해 “성형수술은 하지 않았다. 먹는 것, 노는 것을 절제하고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게 비결”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 |
1961년 만 여섯 살에 처음 무대에 올라 지난 48년 동안 가수 생활을 해온 하춘화(54)씨. 그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성공을 뒤로 한 채, 딸의 노래 인생을 위해 반평생을 바친 특별한 은인이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사랑을 담은 에세이집 『아버지의 선물』(중앙북스)을 내놨다. 책 출간에 맞춰 서울 홍익대 앞 ‘더 갤러리’에서 그간 발표한 앨범 및 공연 포스터·트로피 등을 모아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있는 그를 26일 만났다.
◆아버지, 내 삶의 교과서=책을 구상할 때부터 아버지를 주제로 삼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인생을 회고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됐다.
“아버지는 마흔이 되던 해부터, 노래 잘하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분이세요. 남자 스타들이 ‘항상 함께 있는 아버지 때문에 말 한번 걸기 힘들었다’고 얘기할 정도였죠. 큰 소리를 낸 적도, 매를 든 적도 없었지만, 언제나 올바른 조언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어요. 제가 거만해지지 않도록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셨고, 대중예술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늘 소외된 곳에 사랑을 전하는 가수가 되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하씨는 아이들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작은 지침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50여 년간의 연예계 생활 동안 흔한 스캔들 한번 일으키지 않은 ‘모범 연예인’으로 불리게 된 것도 “항상 절제하는 삶, 겸손한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진·나훈아 시대의 홍일점=48년간 그가 내놓은 앨범은 총 136장, 노래는 2500여 곡에 이른다. 이번 책에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함께 노래를 불러오면서 느꼈던 감상과 의미 있는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첫 번째 히트곡이었던 ‘물새 한 마리’에서 시작해 ‘아리랑 목동’ ‘날 버린 남자’ 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는 “영감~, 왜불러”로 시작하는 노래 ‘잘했군 잘했군’이다.
“이 노래를 민요로 아시는 분들도 많은데, 순수 창작가요예요. 이 노래를 부를 때 겨우 열일곱 살이어서 아버지뻘인 고봉산씨에게 ‘영감~’이라 부르는 게 창피해 거의 울며 녹음했었죠. 이 노래가 그렇게 큰 인기를 얻고, 수십 년간 불리는 국민가요가 될 줄 그땐 정말 몰랐어요.”
당시 최고 인기였던 남진·나훈아씨와 남녀 최고 가수상을 커플로 여러 번 받은 탓에, 두 사람의 팬들로부터 욕을 먹었던 일도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그를 구해줬던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와의 인연, 얼마 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들과의 각별한 사연도 책에 담았다.
“제가 워커힐 호텔에서 공연할 때, 당시 정치 일선을 떠나 그 호텔에서 책을 쓰고 계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찾아오셨어요. ‘목포의 눈물’을 즉석에서 신청하시는 바람에, 반주 테이프도 없이 노래를 했죠.” 그 인연으로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다는 그는 얼마 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바치며 애도했다.
◆아직 꿈 많은 50대=아버지가 그에게 꾸준히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공부에 대한 열정이다. 어린 시절 바쁜 생활로 중단해야 했던 학업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는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 결혼과 함께 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시작했다. 2006년에는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9월부터는 성균관대에서 ‘한일 대중음악 비교’ 강의를 한다.
하씨는 “가수생활 50년을 정리하는 공연도 멋지게 해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며 “아직은 먼 계획이지만, 미국의 버클리 음대에 버금가는 대중음악 전문학교를 세우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