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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비고’ 중 ‘경주 문무왕비’편은 추사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보여준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7일 “정말 사람 미치게 하네. 지금 연구해도 이만한 성과를 내기 어려워…”라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문무왕비는 1796년 경 경주 농부가 밭을 갈던 중 발굴했으며, 이를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가 비의 내용을 대략 서술하고 중국에도 탁본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그 뒤 자취를 감췄다가 1961년 경주 동부동의 어느 민가에서 댓돌로 쓰던 것이 재발견됐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비는 1796년 발견 당시에도 아래 위 2편으로 깨져 있었는데, 현재 아래 편만 남고, 윗부분은 없어졌다.
추사는 ‘해동비고’에서 문무왕비를 자신이 ‘재발굴’했다고 밝혔다. “비는 경주 낭산 남쪽기슭, 선덕왕릉 아래 신문왕릉 앞에 있는데 비석은 없어졌고 비를 꽂는 빗돌받침만 남아 있다. 1817년 경주에서 고적(古蹟)을 찾다가 어느 밭의 돌을 쌓은 둑을 파헤치니 문무왕비 하단이었다. 이를 가져다가 주변의 빗돌받침에 꽂았더니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또 돌 하나가 풀 속에 있었는데 문무왕비의 아래 쪽과 딱 맞아 떨어졌다. 나머지 없어진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1100년만에 발견된 문무왕비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가, 추사가 다시 찾은 것이다. 학계는 문무왕비가 서기 682년 7월 25일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왔다. ‘문무왕 다음 왕’(嗣王·사왕=신문왕)이 세웠으며, 그 날이 ‘二十五日景辰建(이십오일경진건)’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경진날인 25일 세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景辰’이라는 간지(干支)는 없다. 이는 당 고조 이연의 아버지 이름 ‘昞(병)’의 발음을 피하기(피휘·避諱) 위한 것으로, 병진(丙辰)이 옳다.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682년 7월 25일이라는 것.
그러나 추사는 682년은 제외시킨다. 비문에 ‘天皇大帝(천황대제)’라는 표현이 있는데 ‘천황대제’는 당 고종의 시호(諡號)이므로, 그가 죽은 683년 이후여야 한다. 또한 비문에도 ‘단청 색이 바래고, 책은 닳았다’(丹靑?於麟閣 竹帛毁於芸臺·단청투어인각 죽백훼어운대)라고 적혀 있어, 문무왕이 사망(서기 681년 7월)한 지 여러 해가 됐다는 것. 결국 문무왕비는 당 고종 사망(683년) 이후부터 신문왕 재위(692년 7월까지) 사이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추사는 중국의 각종 사서에 적힌 날짜 간지를 바탕으로 “비 건립일은 687년 8월 25일이거나, 이 해에 윤달이 있었으므로 그 직후인 9월 경”이라고 추정했다.
한국천문연구원 안영숙 책임연구원은 “서기 687년 1월이 추사 말대로 윤달”이라며 “25일 병진일 중 683년~692년 7월을 만족시키는 날은 687년 8월과 10월뿐”이라고 했다. 최 실장은 “지금처럼 날짜를 환산하는 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참 대단하다”며 “추사가 역법(曆法)에도 밝았다는 당대의 평가를 실증한다”고 말했다.
김유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7일 “추사의 말처럼, ‘선덕왕릉 아래 신문왕릉 앞’과 비슷한 위치인 사천왕사터에 신라시대 빗돌받침 두 개가 동-서쪽에 각각 있는데, 경주박물관에 있는 문무왕비 조각의 하단과 동쪽 빗돌받침을 지난 2일 실측한 결과 딱 맞아 떨어졌다”며 “동쪽 빗돌받침이 문무왕비의 빗돌받침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신형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