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노자 [老子, ?~?] -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푸른물
2010. 10. 9. 07:38
노자 [老子, ?~?] -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withoutQ 2005-11-28 12:46 조회 770 출처: www.sunslife.com
노자 [老子, ?~?] -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백과사전 설명] - 본명 이이 별칭 노담, 자 담 국적 중국 초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중국 초나라 고현 주요저서 《노자》 성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 인생의 보배를 간직하라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제자 백가 가운데 도가 학파를 이루었습니다. 도가는 특히 공자와 맹자가 대표인 유가 사상과 대결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의 싸움, 유가와 도가의 싸움, 유가와 법가의 싸움 등으로 이어진 전국 시대의 논쟁은 진한대를 거치면서 정리 과정에 들어갑니다. 평등의 이념을 강하게 내세웠던 묵가는 거의 자취를 잃었고, 유가는 법가 등 여러 학파의 이론을 흡수하면서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습니다. 또한 노장 사상은 민간의 주술적 신앙과 결합한 도교에 이용되면서 변형된 형태로 대중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므로 진나라의 통일 이후 중국 역사에서 유가와 도가는 중국 사상의 커다란 두 흐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는 지배층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고, 도교는 민중의 의식 속에 '잡초와 같은 철학'으로 살아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장 사상은 단지 민간에서만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계속 읽혔기 때문에 전국 시대에 나온 어떠한 학파의 저술보다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자>의 저자인 가상 인물 노자는 신비화되고, 도가 학파의 상징적 존재가 됩니다. 특히 도교에서는 노자를 높이 받들어 중국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가 '대륙적 기질'이다 '허허실실'이다 '외유내강'이다 하는 용어를 쓸 때, 그 의미는 노자의 사상과 연관이 깊은 것입니다. ▶ 고전 중의 고전 맹자라는 책은 맹자의 사상을 담고 있고, 순자라는 책은 순자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자라는 책도 노자라는 인물의 사상을 담고 잇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라는 인물은 맹자나 순자만큼 행적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인물의 전기가 사마천의 <사기>에 들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 이미 노자는 전설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먼저 노자의 성명을 이이(李耳)라고 해 놓고, 다시 초나라 사람 노래자나 주나라 역사학자 담이란 인물이 노자일지도 모른다고 하여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노자의 나이가 160세 또는 200세라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여 노자를 신선처럼 여기게 하였습니다. <사기>의 다른 기록에 비하여 노자에 관한 기록은 매우 못 미덥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노자의 전기를 거의 의심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가 젊은 시절 주나라 도서관 관리자로 있던 노자에게 '예'를 물으러 갔다는 이야기나,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노자는 직책을 사임하고 길을 떠났는데 그 도중에 관문의 경비 책임자 윤회라는 사람의 간절한 요청을 못 이겨 도덕에 관한 책 상하편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도덕에 관한 책 상하편'이 바로 <노자>라는 것인데, 지금 학자들은 이 책이 대개 기원전 350년에서 200년 경 사이에 집단 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공자와 같은 시기에 공자보다 선배였던 노자가 <노자>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니게 됩니다. 노자에게 예를 물으러 간 공자가 노자로부터 '교만하게 나서서 설치지 말라'는 내용의 주의를 듣고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노자를 용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했다는 대목도 논란이 많습니다. 중국 고대에는 족보책 두꺼운 집이 양반이라는 식의 논리가 통하여서, 자기 학파가 오랜 전통을 가졌다는 것으로 학파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묵가는 우임금, 유가는 요순, 도가는 황제를 끌어와 연원이 깊음을 경쟁하였습니다. 노자가 공자보다 선배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만들어진 허구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노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과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노자라는 책을 초기의 도가 사상을 연구하는 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노자>는 81개 장, 5000자가 조금 넘는 분량이며, 각 장은 대개 짤막한 운문체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자>를 '노자 도덕경'이라고도 부르는데, 제1장에서 제37장까지가 상편으로 '도경'이고, 제38장에서 마지막 제81장까지가 하편으로 '덕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1장의 첫 문장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로 시작되고, 제38장의 첫 문장은 "최상의 덕은 스스로 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는 것이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 장사라는 곳에 있는 한나라 때 고분에서 나온 책은 이것과 배열이 다릅니다. 장사 마왕퇴 고분은 1972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2000여 년 전의 여자 미이라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973년 2호, 3호 묘를 계속 발굴하였는데, 3호 묘에서 나무 조각에 쓴 글, 비단에 쓴 글이 나왔고 여기에 의학책과 <노자>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왕퇴 고분에서 나온 <노자>는 비단에 쓰여 있기 때문에 '백서 노자'라고 합니다. 백서 노자에는 상하편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자>는 원형이 이루어진 뒤에도 다시 정리되고 개정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의 문장은 시구처럼 아름다우면서 내용이 의미 심장하여 기이한 책으로 알려졌습니다. 도교와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에 노자, 장자, 주역을 '삼현(三玄)', 즉 깊은 이치를 담고 있는 세 책으로 높였습니다. 그 때문에 도가 사상가들뿐 아니라 유가와 불교 쪽에서도 <노자>를 연구하고 주석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자>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하나의 책이 이처럼 여러 입장의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다는 것은 그 책의 무게를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r> <노자>는 연원이 깊은 물줄기와 같아서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仁)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온 천하에 미치게 하면 천하가 태평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가 강조한 도덕은 큰 도가 무너지고 가정이 불화하며 나라가 어지럽게 된 뒤에 그것을 수습하려는 것이었지만, 노자는 그것을 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갔을 때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모기가 물어 대면 밤새 잘 수가 없다. 지금 인의 도덕을 말하는 것은 귀찮게 인심을 어지럽혀 혼란만 더하는 것이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물들이지 않아도 검다. 하늘은 저절로 높고, 땅은 저절로 두껍고, 해와 달은 저절로 빛나고, 별은 저절로 늘어서 있고, 초목은 본래 종류가 여럿이다. 거기에 다시 인의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북을 두드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공자가 주나라의 통치 질서가 무너져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빼앗는 사태를 보고, 주나라의 예법을 회복하기 위한 도덕 의식 개혁 운동에 몸바쳤습니다. 노자는 공자의 이런 노력이 백성들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하는 모기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노자는 잃어버린 양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북을 치면서 찾으면 양이 있는 곳을 더욱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큰 도를 찾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유가의 도덕 규범은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천지는 사람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拘)로 여긴다. 성인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백성을 추구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립니다. 이 주장은 유가에서 "하늘의 뜻은 인(仁)이다", "성인은 인의 실현자다" 하고 말하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에 대하여 어떤 자애의 감정을 가진 조재가 아니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합니다. 도는 공평 무사하여, 선인이니 악인이니 아름다우니 추하니 하는 인간적인 기준들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가에서는 '지성이면 감천' 또는 '인자무적'이라 하여 하늘이 착한 사람을 편드는 것처럼 말하지만, 노자의 도는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에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착하다 악하다 하고 구분한 것도 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노자의 도는, 악하다고 비난받는 사람이 잘살고 착한 사람이 고생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적인 정의감을 발동하여 분노하고 벌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 도의 형상, 도의 작용, 도의 속성 큰 덕의 모습은 도와 같다. 도는 오직 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상을 분간해 인식할 수 없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물(物)이 있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속에 형상이 있다. 도는 아득히 멀고 그윽이 어둡기만 한데, 그 속에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지극히 진실(眞)하다. 그 속에 믿음(信)이 있다.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천지보다도 먼저 생겼다. 고요히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짝도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디나 안 가는 곳이 없건만은 깨어지거나 손상될 위험이 없다. 그것은 천하 만물의 어머니가 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부르는 이름이 '도'이다. 억지로 이름붙여 '큰 것(大)'이라 한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고 한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希)'라고 한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微)'라고 한다. 이 세가지는 말로 밝힐 수 없다. 그래서 혼합하여 '하나(一)'라고 한다. 그것은 위가 더 밝지도 않고, 아래가 더 어둡지도 않다. 긴 끈처럼 꼬여서 이어져 있으니 이름붙일 수가 없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을 꼴 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物)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한다. 도는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陰氣)를 겉에 가지고 양기(陽氣)를 안에 간직하며, 충기(沖氣)로 조화를 이룬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 도는 비어 있는 듯하나 그 작용은 가득 찬 듯 또는 아닌 듯하다. 깊고 아득하여 만물의 근원(宗)이며, 맑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이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하느님보다 먼저인 듯하다. 도는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고 다른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황홀'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표현들을 보면 노자는 남들이 말하지 않았던 무엇을 본 듯하고, 그것에 '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도 이름붙이기를 몹시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우리가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br>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글 속에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내용이 들어 잇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바꿔 놓는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 '자연'이란 말로 도의 성질을 나타내 도가 무한하고 객관적인 존재라고한 것입니다. 중국 고대에는 자연계의 운행도, 인간 세상의 사건도 모두 상제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왕은 상제의 뜻을 받아 지상을 지배하는 하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였습니다. 천자는 상제에게 제사를 올리고, 상제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시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제사를 게을리 하거나 상제의 뜻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면 상제는 가물과 홍수, 그 밖의 천재 지변으로 왕에게 벌을 내립니다. 개인의 경우일지라도 사람답지 못한 행위를 한 자는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합니다. 도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한다고 믿어 온 상제를 부정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면서 만물의 근원입니다. 감각에 들어오는 만물은 총괄하여 '있는 것(有)'에서 나옵니다.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에 잡히고 인간이 이름붙일 수 있는 한정된 것입니다. 도는 인간이 한정할 수 없는 존재,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 무한한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성격을 '무(無)'라고 하였습니다. 도는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무엇에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한다고 하고, 그러한 성질을 '자연'이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딸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자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우리가 '자연 과학' 혹은 '자연 보호'라고 할 때의 '자연'과 전혀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대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의 상태와 성질을 나타낸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저절로 그러하다', '스스로 그러하다', '본래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도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존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노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범위를 넷으로 크게 나누어서 그 사이에 단계를 나누었습니다. 인간과 땅과 하늘은 결국 도를 본받지만, 도는 더 이상 본받을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은 언어, 지혜, 기교를 씀으로써 도의 자연에 거슬리고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이 도 개념을 근거로 유가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인생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 노자의 정치론 나라는 작고, 백성 수는 적어야 한다. 온갖 도구가 있지만 쓰지 않게 하며 백성들이 생명을 중시하도록 하면, 살던 곳을 버리고 멀리 옮겨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배나 마차가 있어도 탈 필요가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노끈을 묶어서 글자 대신 쓰던 고대의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면, 먹는 그대로 맛있고 입는 그대로 아름답고 사는 그곳이 편하다고 여기고 그 풍속을 즐겨서, 이웃나라가 바라보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줄을 때까지 서로 왕래가 없을 것이다. 총명과 지혜를 끊어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로 늘어날 것이다. 인과 의 같은 도덕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이 옛날처럼 효성스럽고 자애롭게 될 것이다. 정교하고 편리한 물건들을 없애 버리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 소극적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외모는 수수하고 마음은 소박하게 하며, 이기심과 욕망을 줄이게 한다. 똑똑한 사람을 높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만든다. 얻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한다. 욕망을 일으킬 만한 것을 보여 주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혼란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의욕을 줄이고 뼈를 튼튼히 하여 늘 백성들이 무지(無知)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며,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무위(無爲)로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천하는 불가사의한 그릇이어서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 잘하려고 애쓰면 실패하고, 꽉 잡고 장악하려 하면 천하를 잃고 만다. 언뜻 보면 원시적 자연 부락의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고, 백성들을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배부르면 좋은 '행복한 돼지'로 만들려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 말드을 새기면, 단순히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거나 우민 정치를 해야한다는 주장만은 아닙니다. 이 말들이 겨누고 있는 현실 상황은, 생산력의 발달로 주나라의 종법 제도가 무너지면서 옛 귀족과 새롭게 신분 상승을 꾀하던 신흥 지주 사이에 이익 다툼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나온 여러 가지 정치적 이론들이 서로 논쟁하면서 직접 일하지 않고 지식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계층이 인기를 얻고 확대되어 간 상황입니다. 노자는 학자라는 자들이 학파를 만들고 서로 논쟁하는 것이 천하를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도 각기 달라 혼란만 더 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잘못 들어섰다고 생각되는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평안하게 할 방도를 놓고 이론이 분분하여 어느 도가 올바른 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노자는 이미 잘못 들어선 길을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하자고 주장합니다. 노자는 이러한 입장을 이론화하였습니다. 노자는 만물의 근원인 도의 성질이 '저절로 그러함(자연)'이듯이 인간을 다스리는 정치의 도는 '무위', 즉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위적으로 계획하고 조장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가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정치을 한 요순 임금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 것"으로 천하를 평안히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면(南面)의 통치술'이라고 하는데, 임금이 자기 자리에 앉아 완전한 인격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들에서 일하는 백성들까지도 착하게 만든다는 것이빈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유가의 도덕적 모범과 다른 뜻입니다. 노자의 도는 유가의 도덕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위'의 통치술을 좀더 설명하면, '요점을 지킨다'는 방법과 '공평 무사하다'는 성격으로 표현됩니다. '요점'이란 곧 노자의 '도'이며, 그것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천하에 맡기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러한 것을 따르지 않고 사사건건 간섭하여 바로잡아 주는 것은 도를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노자는 정치를 생선 굽는 일에 비유하여, 자꾸 이리저리 뒤적이면 생선이 다 부숴지고 타 버리는 것과 같이 정치가 백성들에게 끼어들수록 천하는 뒤죽박죽이 된다고 합니다. 도가 천지 만물에 대하여 인정 사정이 없는 것처럼 '무위'의 정치도 백성들에 대하여 인정 사정이 없습니다. 무위의 이 '공평 무사'라는 관념은 나중에 법가 사상의 법 개념에 영향을 미칩니다. 법가는 지위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정 사정 없이 법을 적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가의 법이 국가의 이익을 가치 기준으로 삼은 반면, 노자의 무위는 백성들의 본래 그러한 삶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백성의 본래 그러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노자의 정치입니다. 큰길은 넓으나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관청은 깨끗하게 지었으나 논밭은 황무지가 되었고, 창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권력자들은 좋은 옷을 입고 고급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밤마다 연회를 열어 음식이 싫증날 정도이다. 그러고도 재물은 남도록 가졌으니, 이것은 도둑질하여 사치에 쓰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도가 아니다. 무위의 정치는 통나무와 같은 자연 상태를 유지하여야 하고, 어쩔수 없어 관청에 기구를 설치하더라도 가능한 한 기구를 축소하여 자연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위태롭지 않다고 합니다. 놀고 먹는 자가 많거나 일하는 사람보다 감독자가 잘사는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요점을 지키는 정치를 가리킨 것입니다. 정치가 너그럽고 간섭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순박해진다. 정치가 자질구레한 구석구석까지 감시하면 백성들은 불만을 품게 된다. 최고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할 뿐이다. 그 다음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고 칭송을 듣는다. 그 다음 수준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 아래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노자의 이러한 정치론은 현대 사회의 정치와 매우 거리가 먼 주장입니다. 인류 역사가 흘러온 방햐오가도 맞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의 가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의 정치는 '예측할 수 있는 정치'나 '위로부터의 개혁' 같은 방법과 180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자의 '대도(大道)'라는 것은 전제군주의 교묘한 통치술의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장차 그것을 축소시키려면 먼저 그것을 확장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약화시키려면 먼저 그것을 강화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없애려면 먼저 그것을 진흥시켜야 한다. 장차 빼앗고자 하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은미한 지혜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그러므로 강한 물고기가 부드러운 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를 이롭게 하는 수단을 백성들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노자의 '대도'는 전제 군주의 비밀 정치를 옹호하고 군주의 통치술에 의존한 정치만을 논하였으며, '대도'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논의와 제도적 장치를 통한 합리적 통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정치론은 전제 군주를 위한 '제왕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원초적 인간의 모습 호사스런 생활을 즐겼던 중국의 어떤 왕은 한끼 식사에 200가지 반찬을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는 어쩌면 고대의 제왕들보다 더 잘 먹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중국의 왕이라 해도 아르헨티나에서 생산된 바나나나 북태평양에서 잡아온 참치를 먹지는 못했을 것이고, 브라질산 커피의 맛은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중국의 왕들이나 특별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었던 책을 손쉽게 구해서 읽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노자라는 책은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와 덕은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말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왕이 된 기분으로, 노자가 인생을 어떻게 강의하였는지 살펴봅시다. 최고의 덕을 가진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고자 하며, 또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최상의 덕은 덕을 얻고자 애쓰지 않고 또한 그것을 바깥으로 자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은 덕은 덕을 얻고자 애쓸 뿐 아니라 그것을 바깥에 나타내어 남에게 과시하려 한다. 높은 덕은 오히려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꾸준한 덕은 불건전한 것 같아 보이고, 진실한 덕은 변하기 쉬워 보인다. 정말로 덕을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정기가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연의 도를 따를는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덕은 자연의 도가 인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최고의 덕을 지닌 인간이 곧 본래 모습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어린아이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이러한 본래 모습을 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도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고 인간을 어리석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지식과 분별심이 발달하고 나서 인간의 기교에 의한 큰 거짓이 나타났다. 안다는 것이 사물의 실상을 아는 게 아님을 아는 것은 최상의 지혜요, 안다는 것이 사물의 실상을 아는 게 아님을 모르는 것은 착오다. 착오를 착오로서 자각하는 그것에 의해 비로소 착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착오에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분별하고 순서와 등급을 매기고 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 자연스런 덕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세계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면서 사람들은 원래 없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만물을 창조한 인격적 존재 같은 것을. 제나라의 전씨가 저택 뜰에서 어떤 사람의 송별회를 열었다. 손님이 1000명이나 모여들었는데, 그중에 물고기와 기러기를 선물로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전씨는 고마워하면서 말했다. "아, 하늘의 은총은 참으로 깊도다. 인간을 위해 오곡을 만들고, 물고기와 새를 길러 인간에게 쓰이게 해 주시는구나." 둘러선 손님들이 입을 모아 전씨의 말에 찬동하였다. 그때 포씨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 나서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틀렸습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우리들과 같은 동료입니다. 동료들 사이에 귀천의 차별은 없습니다. 다만 크고 작은 차이, 지혜와 힘의 차이에 따라 서로 잡아먹고 있을 뿐이지, 다른 것에게 소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제멋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잡아먹을 따름이지 하늘이 인간에게 먹이기 위해 그것들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기나 파리 떼가 인간의 피를 빨고 호랑이와 늑대가 동물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하늘이 모기와 파리를 위하여 인간을 만들고, 호랑이와 늑대를 위해서 동물들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원초적 인간의 모습은 서로 평등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자는 더 나아가 가장 도에 가까운 인간은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만들어 내고도 소유하지 않으며, 일을 하고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을 '심원한 덕(玄德)'이라고 한다. 원초적 인간은 평등한 관계일 뿐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고 양보하며 겸손하다고 합니다. 노자는 '원수를 은혜로 갚으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정의(道)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핍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악을 박멸하겠다는 강직한 태도를 갖는 것은 죽음의 무리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사람의 삶은 본래 곧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사람의 삶이 본래 '부드럽고 약한 것'이라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부드럽고 약하며, 죽음에 가까울수록 단단하고 강해진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의 본래 모습이며, 이것을 지키려고 한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 인생의 무게를 지키는 방법 정말로 흰 것은 언뜻 보면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큰 사각형은 각이 보이지 않는다. 큰 그릇은 완성이 더디다. 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다. 정말로 똑바른 것은 마치 굽어 있는 것 같고, 정말로 능란한 것은 마치 몹시 서투른 것 같고, 진정한 웅변은 오히려 말주변이 없는 것 같다.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잃고 세상이 지혜와 총명의 격전장으로 변해갈 때, 진정한 인생의 무게를 지키려는 사람은 먼저 통속적인 가치를 뒤집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현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수컷의 강함을 알고 암컷의 약함을 지켜 가면, 온갖 냇물이 모여드는 계곡이 된다. 그러면 도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무심한 갓난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영광이 무엇인지를 다 안 다음에 치욕의 입장을 지켜 가면, 만물을 포용하는 골짜기가 된다. 그러면 도가 온전히 그 몸에 실현되어,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통나무같이 자연 그대로의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세상에서 물만큼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재주의 날카로운 칼끝을 누르고 마음의 이해 타산을 버리고 지혜의 빛을 감추고 속세의 먼지 속에 묻혀 산다. 이것이 도와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 모습이며,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도의 작용 방식이다. 모든 현상은 세계의 어머니(道)로부터 태어난 자식이다. 모든 현상의 근원인 도를 알아야 그 자식인 사물을 알고, 그래야 일생을 통해 불행이나 재난을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노자는 어린아이나 새싹처럼 부드럽고 약하게, 물처럼 겸허하게, 골짜기처럼 포용력 있게, 통나무처럼 본래 모습을 지키는 것, 즉 근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무게를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반면, 노자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가치들로서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노자는 이것으로 분열된 세상의 거짓으로 치닫는 도도한 흐름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노자는 자기의 방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포용하여 사랑할 것, 둘째 요점을 단단히 지킬 것, 셋째 천하의 앞에 나서지 말 것입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어긴다.', '물러서는 것이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노자의 말이 모택동의 유격 전술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국민당의 초토화 작젼에 밀리면서 모택동 군대는 1억 5000만 리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그때 유격 전술의 전법은 '적이 공격해오면 달아난다. 적이 쉬고 있으면 괴롭힌다. 적이 후퇴하면 쫓아간다'였습니다.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나라의 한 시골 사람이 가공하지 않은 옥돌을 주워 대신인 자공에게 선물로 바치려 했다. 그런데 자공은 극구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자공을 만나 말했다. "이것은 값비싼 보물입니다. 대신 같은 고귀한 분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우리 같은 천한 자들이 가질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절하시는 겁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자네는 옥돌을 보배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을 보배라고 생각하네." 노자의 철학에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이 모두 값진 것이 아닙니다. 명예나 권력이나 돈이나 모두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노자가 추구한 것은 공자처럼 도덕을 닦아 훌륭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인격도 남들의 입방아에 날리는 쭉정이 같은 것입니다. 노자가 보배라고 생각한 것은 기본적인 생명의 욕구,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인생의 본래 모습을 지키며 살다 간 노자의 독백을 들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진수 성찬이라도 받아 놓은 듯 신바람이 났네. 화창한 봄날 정자에 올라 꽃 구경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나만은 담담하고 조용하고 마음이 동하는 기미도 없네. 마치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마치 아주 지쳐 돌아갈 집도 없는 강아지처럼. 사람들은 무엇이든 남아돌 만큼 가지고 있지만 나만은 모든 걸 잃어버린 것 같네. 야, 나는 바보 같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그저 멍청할 뿐. 남들은 딱 잘라 잘도 말하는데, 나만은 우유 부단, 우물쭈물. 흔들흔들 흔들리는 큰 바다 같네. 쉴 줄 모르고 흘러가는 바람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