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모두 무모한 시도라고 했던 영화제 한국영화 해외진출 밑바탕 돼 뿌듯"한현

푸른물 2010. 9. 10. 07:40

모두 무모한 시도라고 했던 영화제 한국영화 해외진출 밑바탕 돼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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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9.09 03:03 / 수정 : 2010.09.09 07:31

올 부산국제영화제를 끝으로 퇴임하는 김동호 집행위원장
부산 찾았던 외국 관계자들 돌아가서 韓영화 앞다퉈 초청
인맥 넓어 '敵없는 사람' 별명 정치인은 무대 위에 안올려

김동호(73)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15년 집권을 끝으로 올해 퇴임한다. 15년간 그는 국적 불문하고 영화제에서 만난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셔터 소리는 술자리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진들로 언젠가 전시회를 열지도 모른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김 위원장은 부산과 세계 영화제를 돌며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연다. 한국에서 영화제를 일군 '영화제의 아버지' 김동호의 퇴임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소년 김동호가 처음 부산 땅을 밟은 것은 6·25가 터진 1950년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는 미군에서 흘러나온 담배와 초콜릿을 팔며 이 항구도시에서 4년간 피란생활을 했다.

그가 다시 부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59세이던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이후 올해까지 15년간 그는 부산영화제를 이끌어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만들었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첫해 개막식 날 대형 스크린이 올라가던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 없고, 자정 지나 철시한 남포동 거리에서 신문지를 깔고 소주를 마시던 일, 교통지옥인 부산에서 택배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달리던 것은 오랫동안 기억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감회도 새롭고 많은 짐을 던 것 같아서 시원하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께 감사하면서 떠날 수 있어 다행이에요." 그는 부산 시민들에게 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준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부산의 브랜드와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알린 것, 한국영화의 해외진출 관문이 된 것도 성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세계 70여개 영화제를 두루 다니며 한국영화를 알려왔다. 그때마다 부지런히 찍은 사진이 수천 장을 헤아린다. "처음엔 한국 감독들이 무대 인사를 할 때 한국 기자가 없어서, 찍어두면 좋겠다 싶어 찍기 시작했죠. 영화제 한 번에 36컷짜리 필름 10통씩 찍었습니다."

그는 이 사진들을 모두 인화해 1년 뒤든 2년 뒤든 사진 속 인물에게 전해주는 습관으로 이름났다. 습관은 김 위원장의 인맥으로 확장돼 부산영화제의 거름이 됐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 97년 칸 뤼미에르 극장에 선 김기덕 감독 사진과 작년 모로코 영화제에 참석한 배우 강수연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영화계에서 흔히 김 위원장을 '적(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대인관계의 원칙'을 묻자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소탈하게 대하려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소박한 답이다. 영화제 공식만찬을 제외한 모든 식사 대접에서 개인 비용을 쓰고, 전용차량 없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출장 때 이코노미석을 고집하고, 호텔에서 손수 빨래를 하는 그의 삶에는 '적의(敵意)'를 들이댈 만한 틈이 없다.

약점은 있다.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번은 정우성씨를 몰라보고 영어로 인사했어요. 그랬더니 '저 정우성인데요' 하더군요.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기에 외국 유명 배우인 줄 알았죠. 허허허."

엄청난 주량으로 이름난 김 위원장은 일흔 되던 해에 술을 끊고 한 방울도 대지 않았다. 그래도 새벽 2시까지 녹차를 마시며 술자리를 지킨다. "선친께서 워낙 술을 많이 드셔서, 저희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술을 먹이면 커서 안 마신다'며 술을 먹였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밖에서 뛰어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술 항아리에서 막 퍼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문화공보부 주사보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 차관과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 등을 지냈다. 1988년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이 되기 전까지 영화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다.

"이용관 부산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과 전양준 부위원장,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모두 영화제 창설 당시 부산의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쳤습니다. 이분들이 '부산에도 작지만 권위 있는 영화제를 만들자'고 뜻을 모은 뒤 저를 찾아온 거죠." 그때 김 위원장은 '마이TV'라는 케이블 채널의 대표이사였다.

부산영화제는 '무모한 시도'라는 회의적 전망 속에 출발했는데, 첫해 관객 20만을 불러모으며 그런 의구심을 불식시켰다. 특히 한국영화의 세계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산을 찾아온 해외 영화관계자들이 한국 영화를 앞다퉈 초청한 것이다. "프랑스 칸 영화제가 50주년을 맞은 1997년까지 칸에 소개된 한국영화는 모두 4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98년부터 매년 4~5편씩 칸에 소개됐고, 작년엔 10편이 진출했죠." 부산을 찾은 국내 영화인들이 해외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큰 소득이다. 1997년까지 영화 수출은 연 50만달러에 불과했으나, 2006년엔 760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부산영화제에선 관료나 정치인을 보기 어렵다. 개막식을 비롯해 어떤 무대에도 이들이 설 자리가 없다. 1998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회창 후보가 각각 영화제를 찾았지만 마이크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순전히 제 뜻이었어요. 영화제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래서 여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했지요, 허허허."

고희(古稀)를 지난 그에게 퇴임 후 계획을 물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오랫동안 못했던 서예를 다시 배우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유화도 그려보고 싶습니다. HD 카메라를 하나 사서 영화 현장을 쫓아다니며 찍으면 뭔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도 하고 있지요."

22년 전 영화 관료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영화제 수장(首長) 15년을 거친 뒤에야 카메라를 메고 현장으로 가려 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남들과는 거꾸로 가는 것 같지만, 그것도 재미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