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逝去를 애도한다기사 100자평(379)
사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逝去를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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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5.23 22:01 / 수정 : 2009.05.23 22:50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경남 김해 사저(私邸) 뒤 봉화산 바위에서 뛰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바로 1년 4개월 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이 나라를 이끌던 분이 이렇게 비명(非命)에 생(生)을 하직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의 황망한 사거(死去) 앞에서 새삼스레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을 떠올리며 참담한 기분을 느낀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해외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한 이후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심복 부하의 총에 맞아 서거했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포괄적 뇌물죄로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으며,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말년 아들들이 구속되는 가족적 비운을 겪으며 정치적으로도 몰락했다. 한국 대통령들의 비극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한국 정치의 이면(裏面)에 여전히 흘러 내리고 있다는 데 모골(毛骨)이 송연하기까지 하다.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검찰에서 포괄적 뇌물죄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무엇보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됐던 노 전 대통령이었기에 퇴임 후 드러난 본인과 주변의 뇌물 혐의에 대한 민망함과 좌절감이 더 컸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대통령 권력 문화의 부정적 유산을 어떻게 확실하게 단절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것이냐는 문제는 이제 대한민국 전체의 숙제로 남게 됐다.
대한민국 대통령 권력은 제동(制動) 장치가 전혀 없다는 근본적 결함을 갖고 있다. 정권마다 청와대 안의 감시 장치는 물론 청와대 밖의 감시 제도도 아무런 구실도 못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에게 인사(人事)를 포함한 절대 권력이 무한(無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법칙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에게 어김없이 적용돼 왔다. 이 법칙은 이 순간에도 대통령과 그 주변에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최고 권력을 감시할 마지막 기관인 검찰 역시 대통령 인사권 아래 놓여져 대통령과 그 주변의 눈치만을 봐 왔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5년마다, 아니면 대통령 권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임기 말에야 대통령과 그 가족 그리고 그 주변이 검찰에 불려다니면서 사법처리되는 일이 되풀이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구미(歐美) 국가에선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는 데 언론의 비판적 기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시절부터 홍위병(紅衛兵)에 가까운 세력들이 시민단체를 가장해 대통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언론에 대한 전방위(全方位)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권력의 세무사찰 등등의 탄압 방식이 얹혀지면서 언론의 대통령 권력에 대한 감시도 기대하기 힘들만큼 약화됐다. 그 결과 대한민국 대통령 권력은 감시·견제·비판으로부터 해방되면서 결국은 권력 자체의 비리의 무게로 붕괴되기까지 위태위태한 모습을 연출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며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썼다.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선 본인과 부인 아들 딸 사위, 형과 친·인척, 그리고 측근들이 줄줄이 뇌물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거나 이미 구속돼 있는 지금의 사태를 어떤 형식으로든 벗어나고 싶었을지 모른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 이후 줄곧 기성 정치권과 제도에 강하게 맞서온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의 벽을 넘겠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당(黨)의 간판으로 계속 출마했으나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이 2000년 총선에서 부산에서 또 낙선하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탄생했고, 이것을 토대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내 강력한 경쟁자들을 꺾으며, 영남 출신으로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이어 대선에서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2002년 대선에서 등장한 노사모와 촛불, 그리고 인터넷 정치는 ‘노무현 정치’의 상징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재임 5년은 한국 헌정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기성의 헌법 질서와 제도, 정통적 대한민국 역사관 그리고 그 역사를 만든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주도 세력들과 거칠게 충돌했던 시기였다. 노 전 대통령의 재임 5년은 대통령 본인이 제안한 재신임투표, 그리고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불러온 탄핵 파동 등으로 나라 전체가 바람 잘 날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반 이후 대통령의 이런 국정 운영 스타일에 지친 국민의 반감이 커지면서 재·보선에서 잇따라 참패했고, 그를 지지했던 친노(親盧) 세력 전체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는 위기를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다. 본인 희망대로 김해 봉하마을에 사저를 지어 낙향했고,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로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매각 과정에서 수십억원의 불법 자금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 구속된 데 이어, 올 들어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노 전 대통령 부부와 가족이 박연차 전 회장과의 불법 자금 거래 사실이 드러나면서 노 전 대통령의 명랑한 낙향 시절도 끝이 나고 말았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23일 “노 전 대통령에 관한 수사가 이제 종료될 것”이라고 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과 가족에 대한 수사도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의 현 여권 인사들과 관련된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및 박 전 회장에게서 불법 자금을 받은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더 강한 강도(强度)로, 더 빠른 속도(速度)로 진행해 엄정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만 이 땅에서 대통령과 관련된 권력형 비리가 다시는 돋아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할 수 있다. 정부와 국회, 학계와 시민·사회 단체, 국민 모두가 참여해 대한민국의 부패 특히 그 가운데서도 대통령 부패에 관한 근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 불행한 일이 대한민국 역사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계기로 승화(昇化)될 수 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가족들에게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며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도전과 굴절, 영욕(榮辱)으로 가득했던 63년 삶이 이렇게 마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