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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맛] "너의 푸르른 힘으로 고달픈 시절을 버텼다"신정선 기자 vio
푸른물
2010. 7. 10. 07:55
내 인생의 맛] "너의 푸르른 힘으로 고달픈 시절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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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07 03:01
[내 인생의 맛] 소설가 윤대녕과 고등어
첫 직장 출판사 인근에 피맛골 그 골목을 장악했던 고등어 냄새
제주로 이사 가선 직접 낚시 아내는 말했다 "반찬 잡아와"…
하얀 배·푸른 등에서 바다를 봤다 식구가 둘러앉아 바다를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이던 출판사가 광화문 근처에 있었어요. 하루도 쉴 틈 없이 바쁘고 고달프던 시절이었죠. 그 무렵 자주 들르던 곳이 지금은 사라진 피맛골이에요. 좁은 골목길의 허름한 식당에서 내놓고 굽던 것이 고등어였어요.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그 골목에서 먹고, 일하고, 먹고, 일하는 걸 보면서 삶의 회복력을 배웠지요. 그래서 에세이집 '어머니의 수저'에서 고등어를 두고 '너의 그 푸르른 힘을 빌려 간신히 그 시절을 지나왔다'고 한 적도 있죠.고등어의 맛을 제대로 알 게 된 건,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뒤였어요.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회복해야겠다 싶어서 내려갔죠. 2003년부터 2년쯤 거기서 지내는 동안 매일 바다에 나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낚시를 좋아했거든요. 군대에서 만난 친구가 바다낚시를 좋아했는데, 그 녀석 따라다니면서 좋아하게 됐어요.
제주도에서 방금 잡은 신선한 걸 먹어보기 전까지, 고등어가 그토록 맛있는 생선인지 몰랐어요. 갓 잡은 걸 소금에 구워 먹으니 다른 반찬은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뽀얗고 폭신한 살이 씹을 사이도 없이 넘어가죠. 기름이 많으니 고소하기까지 하고요. 제주도에서는 염장한 다음에 초절임해서 먹기도 해요.
- ▲ 소설가 윤대녕씨가 광화문의 제주도 음식전문점‘한라의 집’에서 고등어회를 한점 집어들었다. 그는 여름밤이면 바다를 건너오는 고등어떼의 꿈을 꾼다. /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살아있는 고등어는 '살아있음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죠. 살아서 펄떡이는 고등어는 좌판에 누워있는 고등어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줘요.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그만큼 뚜렷하게 보여주는 생명체도 없을 거예요.
낚시를 오래하면 바다를 좀 읽을 줄 알게 돼요. 풍향, 조류의 흐름, 햇빛의 각도, 물때의 변화를 몸으로 익히게 되는 거죠. 여름밤 제주도 바다에 앉아있으면 고등어떼가 몰려오는 게 몸으로 느껴져요. 고등어떼가 바다를 밀고 오는 소리가 환청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그 느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밤바다가 보내는 우주의 신호 같죠. 고등어는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 때문에 한 번 잡히기 시작하면 계속 잡혀요. 게다가 탐식성이 강해서 미끼를 던지자마자 물고 늘어지니 잡기 쉽죠. 한 번 나서면 수십 마리씩 잡았어요.
물고기마다 성질이 다른데, 고등어는 산만하죠. 정신없이 사방으로 튀고요. 유선형 물고기들이 대개 그래요. 그놈들이 물었다 싶을 때 내 몸에 전해오는 전율과 생명력을 느끼고 있자면, 우주와 교신하는 느낌이 들어요. 바다가 주는 순환의 리듬을 고기를 통해서 느끼는 거죠. 고등어와 달리, 감성돔 같은 납작한 애들은 점잖다고나 할까, 미끼를 물고 나서는 밑으로 먹이를 끌어서 숨어들어 가려고 해요. 굉장히 귀족적이죠. 잡기도 어렵고요. 무리지어 다니는 고등어는 개체 하나하나보다는 전체성으로서의 강렬한 생명성을 보여줘요. 개체성으로서의 존재감 없이 스스로를 내주는 성질 때문에 사람의 본질과도 잘 맞는 게 아닌가 싶어요.
고등어는 제게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가르쳐줬어요. 제주도 시절에 아내가 가끔 말했어요. 반찬 떨어졌으니 고등어 잡아오라고요. 바다에 나가서 2시간 정도 있으면 양껏 잡아오니까 고등어 반찬으로 다 같이 배불리 먹었죠.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먹던 달콤한 흰 살의 맛이란. 고등어를 잡아서 집에 가지고 오면 손질부터 설거지까지 제가 도맡아 했어요. 회를 떠서 식구들에게 먹이며 가장으로서의 뿌듯함을 맛봤죠. 먹을 걸 잡아오고, 먹고, 먹여주며 단순하게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아내는 지금도 가끔 말해요.
고등어를 잡는 것은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바다를 느끼고 생명을 느끼는 것이죠. 바다의 순환과 맞물린 우주의 리듬을 느끼는 거고요. 요즘도 저는 여름밤이면 까만 밤바다를 지나 희디흰 배로 물결을 밀고 오는 고등어떼의 꿈을 꿉니다.
●고등어는… 싸고 영양 풍부해 '바다의 보리' 잡히면 금방 죽고 쉽게 상해 회로 먹기 시작한 건 오래 안돼
잡히면 금방 죽고 쉽게 상하는 고등어를 회로 먹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횟감으로 쓰이는 고등어는 잡는 즉시 머리에 침을 놓는데, 이를 '수면 고등어'라 한다. 살아있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 것이다. 쉽게 산화되고 썩기 때문에 소금을 쳐 자반고등어로 즐겨 먹는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안동에서 독특한 고등어 염장법을 개발해 짜지 않고 쫄깃한 안동 간고등어가 생겨났다.
어느 집 밥상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고등어의 서민성은 여러 시와 노래에서 확인된다. 작가 공지영은 살았을 때 은빛으로 빛났으나 죽어 시장 좌판에 누워 있는 고등어에 80년대 운동권의 내면을 투사(소설 '고등어')했고, 자반고등어를 본 시인 김명인은 '겹쳤던 몸을 떼내니 함께 절었던 세월조차 쓰리'다고 읊었다.
아침상에 올릴 고등어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잠든 어머니(산울림 '어머니와 고등어')를 노래하거나, '같이 고등어살을 발라먹던 여자'(강정, '고등어 연인')를 회상할 때도 등장했다.
●윤대녕은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현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등을 냈으며 최근작으로 소설집 ‘대설주의보’가 있다.
이상문학상(1996)·현대문학상(1998)·이효석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2006년 펴낸 맛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는 음식에 관심이 있는 독자의 필독서로 꼽힌다. “나이 쉰이 되는 내년에는 삶의 본질에 천착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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