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바닥 훑은 현장 경험에‘500대 1’ 문이 열렸다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7. 2. 11:44

바닥 훑은 현장 경험에‘500대 1’ 문이 열렸다 [중앙일보]

2009.01.28 02:00 입력 / 2009.01.28 03:06 수정

LG패션 첫 외국인 신입사원 … 중국인 류웨이둥 성공기
가난한 산골서 태어나 낮엔 공장, 밤엔 공부
150만원 들고 한국 유학 … 의류업체 다니며 공부

어느 한족(漢族)이 있다. 자란 곳은 중국 지린(吉林)성 산골마을. 지독한 가난으로 낮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공부했다. 그래도 미래는 더 나을 것이라는 꿈을 키웠다. 그러곤 단돈 150만원을 들고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등하굣길 지하철을 도서관 삼았다. 그러기를 6년여. 풍부한 경험을 무기로 지난해 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LG패션에 입사했다. 이 회사 경영진은 그의 생생한 삶을 높이 평가해 합격시켰다. ‘어느 한족’의 이름은 중국인 류웨이둥(劉偉東·30).

가난도 국적도 스펙(학점·토익점수 등 입사 지원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항목)도 극복했다. 한국인 구직자들과 겨뤄 500대 1의 경쟁을 뚫고 LG패션에 입사한 중국인 류웨이둥이 매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도훈 인턴기자]

지난해 10월 LG패션 신입사원 최종 면접장. 면접관이 류웨이둥에게 생산부문 지원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회사에 돈을 벌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구본걸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빙긋 웃었다. 류의 당찬 부연 설명. “보병 경험이 있어야 훌륭한 장군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생산부문에서 일을 시작해야죠.” 그러면서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압축시켜 말했다. 의류회사에서 일할 때 생산비용을 줄여 이익을 올린 사례도 들었다. 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구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직접 장군 해도 되겠네.” 이어 구 사장이 잡은 펜은 ‘합격’을 그리고 있었다. 류가 이 회사 첫 외국인 신입사원이자 19명을 뽑는 신입사원 선발에서 9500여 명의 한국인 경쟁자를 이기는 순간이었다.

◆바닥부터 훑었다=깡촌에서 자란 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배우면 희망이 생긴다는 각오로 다롄(大連)으로 나가 다롄외국어대 일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2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했다. 농사 짓는 부모 수입으로 대학은 사치였다. 그때가 2001년 말.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앞다퉈 중국에 투자할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족이었지만 조선족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대학에서는 일본어도 배운 터였다. 한·일 기업이 합작으로 세운 봉제공장에 들어가 간단한 통역일을 시작했다. 이후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까지 맡았다. 2년간 일했다. 2004년 그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중·일 3국을 오가며 일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더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한국에 와서 그는 중국어 과외와 식당 일을 하며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했다. 그러곤 한국외국어대 일어과에 입학했다. 어려운 살림에 학교까지 다니게 되자 그야말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주말엔 아예 유명 브랜드에 납품하는 의류회사에서 살았다.

집은 서울 구로동 회사 근처 고시원에 얻었다. 전철이 끊길 때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문동 학교까지 왕복하는 지하철 안은 그만의 공부방이었다. 의류회사에선 비록 비정규직이었지만 중국산 원단 구매 업무를 맡았다. 중국인인 데다 중국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경험 덕이었다. 이때 중국 모피 생산업체와 직거래를 뚫는 일도 해냈다. 대행사를 통할 때보다 가격을 30% 낮출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얻은 생생한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현장에 있으면 길이 보인다=LG패션 인사담당 변희운 부장은 “한국인 지원자 열에 아홉은 ‘면접 스터디’를 통해 학습된 천편일률적인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이에 비해 류의 대답은 생생해서 경영진의 주목을 끌었다”고 말했다. 면접관들이 그를 크게 평가한 것은 그가 동종업계에서 이미 훈련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변 부장은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점이 돋보였다. 특히 비용절감을 일궈낸 비즈니스 마인드를 키운 점을 높이 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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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는 “회사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구직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분야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라”고 권했다. 현장에 있으면 길이 보이고 노력하면 성과를 낼 수 있으며 그게 쌓이면 “나 안 뽑으면 회사가 손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을 한다고 공부를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학점은 4.5점 만점에 3.6점이다. LG패션은 류를 뽑으면서 외국인 특별전형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졸 지원자와 같은 절차를 따랐다. 변 부장은 “훗날 사업을 잘 이끌어 갈 재목인지 판별하는데 내·외국인에게 차등을 둘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류는 3월이면 중국 상하이지사에서 일하게 된다. 상하이는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도시다. 중국 시장을 더 넓게 개척해 LG패션의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게 그의 단기 목표다. 그는 “바로 이런 게 금의환향인가 보네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박현영 기자 , 사진=김도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