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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피천득 선생은 1910년 경술생이다. 서울 청진동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상하이로 건너가 후장(滬江)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37년부터 서울 중앙고등학원 교원으로 시작해, 광복 후에는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만 30년 가까이 봉직했다. 그리고 2007년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별다른 굴곡 없이 산 삶이다. 하지만 그의 삶의 뒤안길에는 전쟁과 이별, 그리고 상흔과 고독이 도처에 숨어 있다. 그가 상하이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시절은 만주사변이 터지고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피천득의 수필에서는 그런 세월의 상처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를 외면하고 살아서가 아니다. 그의 잔잔한 일상의 힘이 전쟁의 포효마저도 녹여냈기 때문이리라.
# 천안함 사태 이후 우리가 경험하는 이 지루한 위기의 시절에 피천득 탄생 100주년 기념일을 맞는 남다른 소회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천득은 애써 현실을 도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삶의 질곡에서도 소박한 아름다움과 사랑 그리고 삶의 애잔한 추억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은 까닭에 소란스럽다 못해 처절했던 그 시대를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품고 새겼던 청순한 여인의 그 모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애잔하게 전해져 읽는 이들로 하여금 오랜 여운을 갖게 했던 명수필 ‘인연’의 끝 대목이다. 피천득의 수필은 비록 빛은 바랬지만 그래서 더 소중히 간직할 수밖에 없는 한 장의 스틸 사진과 같다. 그만큼 자칫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일상의 순간순간들이 채색도 가감도 없이 포착돼 있다. 더구나 그런 피천득의 수필에서는 아련한 세월의 향수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짧게는 50년, 길게는 70~80여 년 전의 어떤 사건들과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지녔던 향기는 신기하리만큼 고스란히 온존돼 있다. 한마디로 피천득의 수필에는 시대가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결코 멸절시킬 수 없는 인간과 일상에 대한 따뜻함과 애틋함이 묘하게 배어 있다.
# 수필은 일상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 일상의 깊이와 넓이만큼 수필은 존재한다. 일상이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수필이다. 일상의 고민, 번뇌, 기쁨, 성취 등이 수필을 수필답게 한다. 피천득의 수필이 우리를 일깨우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글이 우리에게 “너 자신의 소중한 일상을 재발견하라”고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 피천득의 글을 읽노라면 그는 전쟁과 분란의 한가운데서도 일상의 사랑과 평화를 씨줄·날줄로 자아 나간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전쟁을 각오하고 불사하는 비상함이 일상의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인 것처럼 돼버린 이 시대에 피천득의 글을 다시 읽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정갈한 수채화 같은 한 편의 수필을 통해 우리의 애잔한 삶을 어루만지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던 피천득! 이 황망한 시절에 100년 전 오늘 이 땅에 왔던 그가 새삼 그리운 까닭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