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방랑의 작가' 박인식 부처의 길 따라 100일 동안 걷다] "너는 어디서 왔으
푸른물
2010. 5. 25. 06:37
'방랑의 작가' 박인식 부처의 길 따라 100일 동안 걷다] "너는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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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5.03 02:48
['방랑의 작가' 박인식 부처의 길 따라 100일 동안 걷다] [5]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부처가 49일간 용맹정진하던 그곳… 그리 굵지 않은 나무 수줍게 서 있어
성지순례 온 여러 나라 사람들 가부좌 틀고 깊은 명상에 잠겨
3월 1일 라즈기르를 떠나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두 성지는 90Km쯤 떨어져 있다. 발길 가는 곳마다 카스트 제도마저 버린 사람들인 불가촉천민의 마을이 이어졌다. 아르티라는 마을에서 '축제의 나라' 인도에서도 가장 격렬한 축제라는 '홀리 축제'와 맞닥뜨렸다. 그 바람에 사흘간이나 집안에 갇혀 지냈다. 술과 약에 취한 마을 전체가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 나다닐 수가 없었다.
보드가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들이 불끈불끈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 버려진 땅의 산들은 하늘이 버렸는지 헐벗은 채 작열하는 햇살 아래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뼈대를 다 드러낸 그 산들은 고행(苦行)에 지친 부처의 몸 같았다.
"뱃가죽을 만지려니까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려니까 뱃가죽이 만져졌다."
부처 시대의 구도자들은 가야(Gaya)로 모여들었다. 그 시절부터 가야 일대가 수도처로 이름을 날리게 된 데는 이곳의 척박한 풍토가 한 부조했다. 언제 어디서건 척박하고 버려진 땅에서 고매한 사상이 태어나는 법이다.
당시의 모든 수행은 고행을 지향하고 있었다. 부처가 가야로 와서 처음 고른 고행지는 북쪽 언저리에 솟은 가야산이었다. 그 가야산에 오르면 네란자라 강 건너편으로 우뚝 솟은 전정각산(前正覺山)이 빤히 바라보인다. 그 뼈다귀만 남은 듯한 산이 고행으로 수행하기에 더욱 마땅하게 느껴져 부처는 고행지를 바꿨다. 이 산으로 입산하며 '죽음의 지대'를 넘나든 부처의 6년 고행이 시작됐다. 여기서 부처는 자신의 몸을 고행의 극단으로 몰아붙였다.
먼저 그는 육체의 존재 방식을 부정했다. 여느 사람처럼 먹고 자고 옷 입는 것을 거부했다. 끝내는 들숨과 날숨까지 제어했다. 입과 코로 쉬는 숨을 막자 귓구멍에서 풀무소리를 내며 바람이 나왔다. 예리한 송곳으로 귀를 뚫는 듯했다.
그런 고행의 극점에 오른 뒤에야 부처는 고행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산꼭대기는 원래부터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고행의 극단을 버리고 하산한다. 중도(中道)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중도는 모든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 수 있는 통찰력이자 직관이다."
그렇게 중도를 선언하고 전정각산에서 하산하여 우루벨라 마을로 갔다. 그 마을 촌장의 딸인 수자타가 우유에 쌀을 섞어 쑨 죽을 공양하자 이를 받아먹었다. 그것을 본 부처의 다섯 도반들은 '이제 그도 타락했다' 면서 가야를 떠나 사르나트로 가버렸다.
- ▲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 대탑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전 세계에서 찾아온 불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심병우 사진작가
"내 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여기서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그 나무 아래 앉아 49일간 용맹정진한 어느 날 새벽이었다. 샛별을 보는 순간 그는 문득 깨쳤다.
도중에 바르간지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날인 3월 6일 바라탈라에 이르자 서쪽 지평선 끝에 가야산과 전정각산의 뾰족한 이마가 바라보였다. 보드가야까지 불과 삼십리를 남겨둔 거기서 나는 극단의 고행 끝에 전정각산을 하산하는 부처처럼 의식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네팔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60일이 넘도록 850㎞쯤 걸어온 몸은 부처 곁을 떠나 버린 다섯 고행주의자들처럼 됐다.
- ▲ 구글 어스
그 삼십리를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이 없다. 몸이 워낙 마른 탓일까. 어느덧 몸무게마저 느낄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나 보다. 나는 그토록 멀어 보였던 전정각산을 어느새 지나쳐서는 보드가야의 바자르 골목에 들어서 그 탁한 인도의 사람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보드가야를 상징하는 대탑(大塔)은 보드가야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금강보좌 위에 아쇼카왕이 증축하여 세운 큰 탑이다. 그 탑이 있는 마하보디 사원을 중심으로 세계의 여러 불교 국가가 세운 사원들이 남쪽 들판에 널찍하게 자리 잡았다. 현지인들은 북쪽 시장통을 중심으로 올망졸망 모여 살며 인도 어디서건 볼 수 있는 소읍(小邑)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숙소로 정한 한국사찰 '고려사(寺)'에 짐을 내팽개쳐 놓고서는 거기서 오리(五里)쯤 떨어진 마하보디 사원으로 달려갔다. 어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서 있을 보리수를 친견하고 싶어서였다. 그 나무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숨 넘어갈 듯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대탑을 동쪽으로 끼고 그 서쪽에 그 나무는 수줍게 서 있었다. 우듬지가 그리 굵지 않았다. 부처의 깨달음을 지켜본 보리수의 손자뻘 되는 나무다. 성지순례 온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보리수와 금강보좌를 향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곁으로 몸을 날려 오체투지했다.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대자 생의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태어난 그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는 가야이며 내 고향 경북 청도 또한 옛 가야 땅이다. 우리 가야라고 불러 보았다. 보드가야라고도 불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속 가얏고 줄도 떨었다. 그때였다. 내 몸에서 하얀빛의 덩어리가 빠져나갔다. 깃털 같은 그 빛의 덩어리가 그 자리에 엎드려 일어날 줄 모르는 내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으며, 너는 누구이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