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동아광장/윤석민]공격당한 나라의 국민에게 고함

푸른물 2010. 5. 19. 06:24

동아광장/윤석민]공격당한 나라의 국민에게 고함

 
2010-05-12 03:00 2010-05-12 07:33 여성 | 남성



천안함 사태의 끝은 어디인가. 대통령의 전군지휘관회의 소집, 어뢰 파편으로 추정되는 알루미늄 조각 발견 및 화약성분(RDX) 검출, 북측의 특수전 병력 5만 명 최전방 배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과 후진타오 주석과의 회동, 목전에 다가온 민군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발표…. 숨 가쁘게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노라면 마치 전속력으로 충돌을 향해 치달리는 열차에 탑승한 듯 아찔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이 열차에 비상 브레이크는 있기나 한가. 열차에 타고 있는 국민은 과연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몇 차례 모임에서 천안함 사태에 대한 국민정서의 일단을 살필 기회가 있었다. 첫째는 필자가 지도하는 학부 학생들과의 저녁자리였다. 20대 초반, 과거 누구보다 치열하게 국가와 사회, 이상과 현실을 고민하던 집단이다. 하지만 요즈음 이네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학교생활, 시험, 취업준비에 관한 대화 말미에 천안함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란 질문을 던져보았다. 잠시 심각해지나 싶더니 한 학생이 대답했다. “아무 생각 없어요∼.”

며칠 후, 최근 수행 중인 연구와 관련해 업계 현장의 실무자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주 참석자들은 30대 중후반, 현실에 대한 자신감과 에너지가 충만한 나이다. 이런저런 사회현안을 거쳐 천안함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누군가 “아, 지겨워” 했다. 침몰 원인을 둘러싸고 좌초설 대 미군 오폭설을 지지하는 두 패가 설전을 벌였다. 화제가 주가 동향으로 넘어가서야 필자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안함 관련 거대한 인지부조화

하지만 압권은 한 포럼모임이었다. 대학교수며 기업 임원이며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까지 삶의 정점에서 사회, 조직, 가정을 어깨에 짊어진 집단이었다. 공식 순서 후 유학 중인 자녀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한 사람이 물었다. “공부 마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공부가 끝나도 절대 한국에 나올 필요 없다. 천안함 봐라. ×죽음 아니냐. 군대 안 보낼 수 있으면 보내지 말아야 한다.”

필자 주변의 제한된 사례이지만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우리 사회 저변의 분위기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정부에 대한 극한의 불신, 이기주의 내지 ‘아무 생각 없음’이 도를 넘었다는 판단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이 같은 심리상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회심리학의 고전적인 인지부조화 이론이 하나의 설명을 제시한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천안함 사태와 그 주범으로 북한이 지목되는 정황은 평화로운 삶을 원하는 우리 국민의 심리에 거대한 부조화를 발생시켰다. 북을 끌어안으려는 측에서 부조화를 해소하는 지배적 방식은 천안함 사태와 북의 관련성을 억지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부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와 상반된 입장을 지닌 이들은 주적(), 즉각적 보복 운운하며 그에 대처하려 한다.

대다수 국민이 부조화를 해소하는 방식은 이 양극단의 중간 어디쯤에 해당될 것이다.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지배적 가설(어뢰설)과 북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 핵심대책으로 초기대응에 허점을 드러낸 군의 기강 강화, G2와의 외교적 공조 등을 강조하며 북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회피하려는 입장이다.

이는 분단체제가 빚어낸 근원적 부조리, 즉 일촉즉발의 남북대치 상황 안에서 아무 일 없는 듯 먹고 자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기형적 삶의 양식과 그 궤를 같이한다. 가장 온건하고도 현실적이라 할 이 방식을 통해 우리는 지금껏 그나마 이 정도의 평화라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갈수록 무모해지는 북의 도발, 그에 정비례하는 우리의 무기력증 내지 위기불감증 심화가 그 후유증으로 남았다.

각오라야 평화 지킨다


천안함 사태로 드러난 군의 기강해이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중국을 상대로 국제적 대북제재 조치에 공조할 것을 요구하는 외교적 노력도 끝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군을 질타하고, 중국에 대해 목청을 세운다고 될 일인가. 군의 기강, 중국의 외교적 입장은 더도 덜도 아닌 우리 국민적 상태의 반영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이 사태를 유야무야 넘기자는 것이 국민 대다수의 의식수준일 때 군의 기강이 바로잡힐 리도, 중국이 우리의 요구를 엄중하게 받아들일 리도 만무하다.

현충사 참배 후 대통령이 방명록에 ‘필사즉생 필생즉사( )’라고 썼다. 떨리는 심정으로 우리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할 구절일 것이다. 이러한 각성 없이 우리의 일상이 천안함 사태를 또다시 덮어버릴 때 이 땅의 진정한 안보, 진정한 평화는 정녕 무망한 일이 될 것이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