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중앙시평] 천상시인의 행복론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10. 4. 16. 12:23

중앙시평] 천상시인의 행복론 [중앙일보]

2010.04.12 00:08 입력

시인에게는 흔히 별칭이 따른다. 영국 정부로부터 명예를 공인 받은 계관시인(桂冠詩人)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체제시인도 있다. 시의 주조(主潮)에 따라 저항시인·부조리시인·구도(求道)의 시인 같은 묵직한 이름이 붙기도 하고, 전원시인·민족시인·방랑시인처럼 시인의 특성을 오롯하게 담아낸 정겨운 애칭으로 불리는 이도 있다. 그 밖에 다른 이름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별칭 가운데 천상시인(天上詩人)만큼 아득히 높은 이름이 또 있을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고(故) 천상병 시인에게 천상시인이라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이름을 안겨준 시 ‘귀천(歸天)’이다. 새봄의 꽃과 나무들을 유난히 사랑했던 천 시인은 오랜 투병 끝에 산수유·개나리·진달래·벚꽃 흐드러지게 핀 1993년 4월 어느 봄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다.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려고. 엉뚱한 일로 터무니없는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고까지 치른 천 시인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오랫동안 병상을 떠나지 못했다. 행려병자로 몰려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어이없게도 유고집(遺稿集)이 발간되는 일마저 벌어졌다.

시련과 고통의 세월을 뒤로하고 천 시인이 천상으로 떠난 지 열일곱 해 되는 봄, 자신의 말마따나 ‘시를 쓰는 가슴만 남고 바보가 되어버린’ 천상시인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반갑잖은 정치꾼들이 제 세상 만난 듯 활개 치는 선거철이 또 가까워오는 탓일 게다. 벌써부터 돈 봉투, 공천헌금 따위의 말들이 떠도는 판이다. 수십 명 장병들을 잃은 천안함 침몰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긴 이 슬픈 봄에 말이다. 봄날 들판의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천상병의 시어(詩語)에는 혹독했던 현실의 삶을 소풍에 비유할 만큼 넉넉한 초월이 진득 배어 있다. 삶에 대한 고요한 관조(觀照), 욕망과 번뇌로부터의 자유로움, 죽음을 향한 엄숙한 순명(順命)을 ‘소풍’만큼 모두 한 품에 끌어안고 있는 단 하나의 단어를 나는 달리 찾지 못하겠다. 천 시인의 관조는 어둡거나 축축하지 않다. 밝고 깔끔하다.

그의 순명 역시 허무의 운명론이 아니다. 죽음을 향해서도 ‘돌아가리라’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밝은 소망이다.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저녁노을조차 시인에게는 싱그러운 새벽이슬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초월이 없다.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 이 우주에서 / 가장 강력한 분이 / 나의 빽이시니 /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시 ‘행복’). 천상시인의 현실감 없는, 그야말로 바보다운(?) 행복론이다. 직업을 ‘가난’이라고 썼을 만큼 평생 빈곤했지만 그는 결코 초라하거나 비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가진 초월자 안에서 아쉬울 것 없는 충만을 누렸다. 그의 가난은 성소(聖所)처럼 정결했고, 그의 고통은 순교자처럼 거룩했다.

시인은 이승의 소풍 길에서 이미 하늘의 삶을 살아낸 것이 아닐까? 권력의 부패, 가진 자들의 불의에 대하여 저항과 증오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던 그 ‘의로운’ 시절에도 힘 있는 자, 부패한 자, 심지어 자신을 고문한 자들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경이로운 평상심(平常心)은 이 세상의 소풍 길 끝에서 기다리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빽’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신비였다.

군함이 깨지고 구조 선박이 침몰하여 수십 명의 장병과 선원들이 바다에 실종된 국가적 비극마저도 정파적 이해관계의 사시(斜視)로 흘겨보면서 그저 표 싸움만을 일삼는 극한정치(極限政治)가 이 슬픈 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살다 보면 뜻이 맞는 일도 가끔은 있으련만,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면서도 저마다 외쳐대는 시대정신은 어찌 그리도 정반대로만 치닫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천상시인의 해맑은 영혼이 이 시절의 ‘정신 나간(?) 시대정신’들과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되어온다. 시끄럽고 혼탁한 선거판에 지레 겁먹어 뜬금없이 천상시인의 아름다웠던 소풍 길을 회고하는 것은 그의 행복론만큼이나 바보 같은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