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경> 발견한 박병선 박사
“오늘도 안 됩니까(Aujourd’hui, on ne peut pas)?” 1980년 봄,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가(街)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년처럼 머리칼을 짧게 친 52세의 한국 여성이 또박또박 물었다. 도서관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여성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그는 몇 달 전까지 이 도서관에 근무하던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81) 씨였다. 박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1955년 홀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소르본 대학과 프랑스 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천만 종이 넘는 장서를 뒤져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과 외규장각 도서 2백97권을 찾아내 주불 한국대사관에 알렸다.
프랑스 상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박 씨는 뜻을 꺾는 대신 사표를 냈다. 이후 매일 도서관에 찾아가 ‘개인’ 자격으로 외규장각 도서 열람을 신청했다. 옛 동료들의 냉대를 견디며 매일 “오늘도 안 됩니까?”라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한 달 만에 간신히 열람 허가가 떨어졌다.
지난 10월 30일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서 만난 박 씨는 “이후 10년 넘게 매일 도서관에 가서 외규장각 도서의 목차를 베끼고 내용을 요약했다”며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봐 밥도 안 먹었다”고 했다.
박 씨는 지금 암 투병 중이다. 병인양요에 대한 한국 사료를 모으러 지난 9월 서울에 날아왔다가 격렬한 복통으로 병원에 갔다. 의료진이 직장암 4기를 선고했다. 그는 무너지거나 흐트러지는 대신 또렷하게 말했다.
“내 연구를 정리하려면 아직 1년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 1년만 주어진다면 하느님께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그는 인터뷰를 세 번 거절했다. “아픈 걸 보여주는 게 싫다”고 했다. 간병인이 그런 뜻을 전하며 병실 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흰 시트에 놓인 노인의 야윈 발이 보였다. 네 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6·25전쟁 직후(1955년) 프랑스에 건너갔어요. 한국 사람이면 당연히 병인양요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어요? 애초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취직한 것도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랑스 함대가 가져간 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풍문을 들었거든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죠.”
도서관에 근무하던 시절, 박 씨는 틈만 나면 서고를 뒤졌다. 서고를 나설 때면 먼지 때문에 손과 콧속이 까맸다. 그는 단순히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사람이 아니라 이 책이 1455년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빠른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건 우리 불경이고, 나아가 금속활자본이 맞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감(感)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파리의 인쇄소와 신문사에서 금속활자 주형을 얻어다 집에서 직접 찍어봤다. 납 활자를 만들어 찍어보느라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불교의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적은 오래된 종이 위에서 미세한 금속 부스러기를 찾아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그만둔 뒤에는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며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0권 넘는 학술서를 썼다.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 평생 내 일이었어요.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내가 너무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라 그랬나 봐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었던 거지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사료를 찾아내는 작업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이와 관련된 사료가 굉장히 많다”며 “우리 세대가 죽고 그 모든 사료가 흩어지기 전에 다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관련 자료를 모아 총 다섯 권짜리 책을 낼 계획이었지만 1권이 나온 뒤 정부의 지원이 끊겨 중단했다.
그는 프랑스 공무원 신분으로 한국 문화재를 찾아냈다. 이후 프랑스 공무원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며 우리 역사를 연구했다. 지인들은 “평생 프랑스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돈이 안 되는 연구를 계속한 분이라 재산이 없다”고 발을 굴렀다.
이런 말이 귀에 들어가면 그는 크게 화를 냈다. 인터뷰를 여러 번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병’보다는 ‘국가의 일’을 얘기하고 싶어 했다. 집필 중인 역사서 얘기가 나오면 병상에서도 신이 나서 몸을 들썩거렸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밝힌 책이에요. 당시의 일기나 편지 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것도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한 것도 다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에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걸 연구해서 제대로 알리는 일이 얼마나 짜릿한지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보도가 나간 뒤 문화재청과 삼성화재, 신한은행, 한독약품, 현대·기아자동차 등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해 성금을 전달했다. 청주시와 독자들도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소식이 뜸했던 지인들과 박 씨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병실에 찾아왔다. 박 씨의 치료비와 맞먹는 금액이 모였다.
27세에 한국을 떠난 박 씨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로 “기운을 차리고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프랑스 음식을 먹는 것, 병인양요에 대한 책을 마치는 것”을 꼽았다. 그러나 병인양요에 대한 책을 출판해줄 곳도 당장 없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놓고 있는 박 씨를 보고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la femme cachee derrie relelivrebleu)’라고 했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다.
글·변희원(조선일보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