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맑고 고고한 소리… 그의 나이는 95세현역 최고령 시조가객 김성수옹 새 음

푸른물 2010. 2. 7. 07:10

맑고 고고한 소리… 그의 나이는 95세

현역 최고령 시조가객 김성수옹 새 음반 내

    발행일 : 2009.09.10 / 문화 A2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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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일 충청북도 제천 시내 우리소리연구원. 좁은 2층 계단을 올라가자 "천지(天地)는 만물지역려(萬物之逆旅)요, 광음(光陰)은 백대지과객(百代之過客)이라"는 평시조 〈천지는〉의 가락이 흘러나왔다.

    '천지는 만물이 머무는 여관과 같고,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라는 뜻을 담은 가객(歌客)의 노래에는 청아하고 해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최근 15편의 시조를 불러서 〈아흔다섯의 노래〉(국악방송)라는 음반을 펴낸 95세 현역 최고령 시조 가객인 김성수(金聖洙)옹의 목소리였다.

    1915년 10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씨는 7세 때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단소 소리에 빠져버렸다. "어른들이 고장 난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귀한 걸, 레코드가 뭔지도 모르고 틀어본 거지. 민요 가락과 함께 흘러나오던 단소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 흘려보내면 그뿐인 걸, 흘려보내질 못했으니 팔자소관인 거지."

    7세 소년은 지우산(紙雨傘)을 자르고, 송곳으로 구멍을 대충 뚫어서 단소를 만들었다. 그의 첫 악기였다. 인근 동네에 진짜 단소가 있다는 소문에 30리 길을 걸어가서 단소를 선물받기도 했다. 부모님은 '10년 공부해도 빌어먹게 된다'며 종아리를 피나도록 때렸다. 하지만 김씨는 "목숨 같은 단소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생각에 산에 올라가 숨어서 하루종일 불곤 했다. 15세 되던 해, 레코드 판에서 나오는 단소 가락을 흉내 낼 정도가 되자 부모님도 허락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 때까지 김씨는 면사무소에서 일하고, 영림서에서 근무하며 잠시 국악을 잊고 지냈다. 하지만 1957년 무형문화재 제41호 보유자인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1916 ~2003) 선생이 충남에 내려오자 한 살 많은 김씨는 찾아가 제자를 자청했다. 1주일간 장구를 배우며 장단부터 잡았고, 두 달 만에 천안에서 열린 전국 시조 경창 대회에서 평시조 〈청산리〉를 불러 2등으로 뽑혔다.

    그렇게 5년간 사사한 김씨는 "스승은 내가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감히 올라갈 수는 없는 거대한 산과 같았다. 하지만 그 산 밑까지라도 가 보자는 각오가 들었다"고 말했다. 60도짜리 독주(毒酒)를 반 되씩 비우곤 하던 애주가에, 하루 담배 한 갑씩 피웠던 애연가였지만 목청에 지장이 생길까 봐 전부 딱 끊었다.

    김씨는 지금도 매주 5차례씩 연구원에 나와서 하루 4시간씩 시조와 민요, 단소를 가르친다. 오전 5시면 기상하고, 오후 10시가 되면 잠을 청하며 소식(小食)을 잊지 않는다. 19년째 시조와 민요를 배우고 있는 윤지열(尹智烈·73)씨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식사하셨느냐'고 존댓말을 하시는 선비 같은 분"이라고 했다. 채치성 국악방송 본부장은 "단전에서 깊은 호흡으로 다스린 김성수 선생의 소리 공력은 95세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고고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조(時調)가 '시(詩)'가 아닌 '시(時)'를 쓰는 건 농사를 권하고 학문을 권하며 늙음을 탄식하는 등 언제나 시와 때에 맞는 노래를 읊기 때문"이라며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노래는 멋이나 품격을 잃고 만다"고 말했다. 시조를 읊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는 자세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기고자:김성현  본문자수:1611   표/그림/사진 유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