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낙원동 허리우드 극장
“추운 날 이렇게 많이 오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역마차’라는 한국 영화입니다.”27일 오후 2시쯤 서울 낙원동 허리우드 극장. 김은주(36) 극장장이 스크린 앞에 서서 육성으로 영화 안내를 시작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320개의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다.
영화가 막 시작할 무렵 “뒤에서 잘 안 보이니 모자 좀 벗어 달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어르신들 모자 벗어 놓으면 그냥 놔두시고 가잖아요. 잃어버리는 게 특기시니 푹 눌러 써주세요”라고 김씨가 웃으며 받아넘겼다. “맞아. 우리가 그래”라고 말하자 객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온다. 영화가 시작된 것은 오후 2시40분. 예정보다 10분 지나 있었다.
국내 최초의 ‘실버영화관’인 허리우드 극장이 21일로 개관 1주년을 맞았다. 다른 영화관에서는 찬밥 신세지만 이곳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대접받는다. 만 57세 이상은 요금이 2000원으로 일반인(7000원)보다 훨씬 싸다. 게다가 표를 한 장 사면 하루 3회 상영하는 영화를 계속해서 볼 수 있다. 관람객은 하루 200~300명으로 연간 6만3000여 명이 넘는다. 이곳에서는 ‘워낭소리’ 같은 최신작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마부’와 같은 고전영화까지 다양하게 상영한다.
‘여사장’ 김씨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외관의 영화관 대표이자 최연소 극장장이다. 김씨는 1969년에 지어진 미근동 ‘드림시네마’와 낙원동 ‘허리우드 극장’을 갖고 있다. 영화관이 리노베이션을 거쳐 속속 멀티플렉스로 거듭나도 두 극장은 옛 모습 그대로다.
김씨는 대학에서 컴퓨터학을 전공했다. 드림시네마에서 10년 넘게 마케팅 일을 하다 은퇴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고 싶어 2005년 드림시네마를 인수했다. 이후 재개발로 드림시네마가 문을 닫아야 할 처지가 되자 허리우드 극장을 인수했다. 다행히 재개발이 늦춰져 두 영화관의 대표가 됐다.
고전영화 매니어인 그는 스트레스가 있을 때마다 허리우드 극장에서 옛 영화를 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관객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추억을 먹고 사는 노인들에게 고전영화는 힘이 됐다. “여사장, 제발 영화관을 없애지 말고 유지해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경기도 오산·일산, 인천에서까지 찾는 사람도 많다. 조덕환(69·서울 마천동)씨는 “집을 나서서 마음 놓고 갈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어르신들은 동네 사랑방에 온 것처럼 편하게 웃고 떠든다. 정지용(68·서울 당산동)씨는 “고전영화를 보면 어렸을 적 생활했던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돼 감동적”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2000원의 요금을 받아 영화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왜 사서 고생하느냐”며 남편이 말렸다. 그러나 ‘극장을 계속 꾸려 나가겠다’고 어르신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고, 예·적금 통장을 깨 돈을 극장에 쏟아 부었다. 그래도 2억원의 적자를 봤다. ‘이제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어르신들이 김씨의 손을 잡았다. 지난해 11월 1200여 명의 어르신이 서명운동에 나선 것이다. ‘허리우드 극장을 국가가 지원해 달라’는 요청서였다. 다행히 서울시가 올해부터 실버영화관에 예산 3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씨는 영화관 로비에 DJ부스를 만들어 LP판을 틀 예정이다. 어르신들이 사랑방처럼 극장을 찾고, 옛 노래를 들으며 편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김씨의 주머니는 “용기 잃지마”며 어르신들이 넣어 주는 귤과 사탕으로 늘 묵직하다.
“멀티플렉스에서는 영화를 눈과 귀로 보지만 우리 영화관은 한가지 더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마음으로 영화를 봅니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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