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아침논단] 우리 안의 끔찍한 두 얼굴김주연 문학평론가·한국문학 번역원

푸른물 2010. 2. 2. 19:53

[아침논단] 우리 안의 끔찍한 두 얼굴

  • 김주연 문학평론가·한국문학 번역원장
  • 트위터로 보내기
  • MSN 메신저 보내기
  • 뉴스알림신청
  • 뉴스레터
  • 뉴스젯
  • RSS
  • 프린트하기
  • 이메일보내기
  • 스크랩하기
  • 블로그담기
  • 기사목록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입력 : 2009.12.14 22:06

김주연 문학평론가·한국문학 번역원장

입으로는 교육 평등을, 자기 자식은 사교육을…
이런 이중플레이는 대표적인 거짓이요 자기정체성 실종이다
이런 거짓 명목주의는 저 메두사를 방불케 한다

세종시 문제로, 4대강 사업으로 끊임없이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은 틀리는 선악의 문제일까. 국가의 정책이 마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진리의 문제처럼 둔갑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엉망진창이 된 우리네 도덕기준과 윤리감각에 현기증이 난다.

구구절절 옳은 도덕의 입술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현실은 그와 정반대의 위선과 패륜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사회, 양자가 멀리 찢어진 이 사회의 위치는 어디일까…. 자신은 부도덕한 일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입만 열면 정의를 외치는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을 하도 많이 보아서 그런지 그럴싸한 주장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볼수록 느낌이 착잡하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민족에 따라, 환경에 따라, 남녀의 성별에 따라서 그 성격과 행태가 일정치 않다. 가령, 한국인과 미국인, 러시아인은 같은 사람들이지만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과 행동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이런 식으로 남녀에 따른 다름이 있고 어른과 아이들 또한 그 모습이 외면, 내면 모두 다르다. 이런 다름의 카테고리 가운데 대륙형, 해양형, 반도형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대륙형은 전통적으로 관념적인 사고를 하는 데 비해서 해양형은 경험을 중시하며, 반도형은 그 중간을 간다는 해석이다. 러시아중국이 대륙형이라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은 해양형의 경우로 자주 거론된다. 그런가 하면 독일이나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은 아마도 제3의 유형, 즉 반도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물자가 비교적 풍부한 곳에서 경험론이, 그렇지 못한 곳에서 관념론이 발달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관념론으로부터 사회주의가, 경험론으로부터 자본주의가 나왔다는 가설을 가능케 한다.

이 가설은 반도형에 속한 나라들에서 이 두 가지 사상·이념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아예 나라가 양분되는 상처를 겪는 예에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가령, 독일의 경우 양극성은 독일 사상을 끊임없이 분열시켜왔는데, 개인과 전체, 시민성과 예술성,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천재와 규범 등등과 같은 대립적 요소들은 그들이 고통스러워한 이원론이었다.

이러한 양극적 대립과 분열은 19세기 헤겔의 변증법으로 새로운 극복, 즉 지양(止揚)이라는 해결을 만나게 되었고, 정과 반은 합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양극 아닌 삼각의 사고방식을 열 수 있었다.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되었으면서도 다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이처럼 보다 깊은 사상적·철학적 배경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역사적 유추가 가능한, 비슷한 환경의 우리는 어떠한가.

여전히 개탄의 대상이 되고 있듯이 우리에게는 남과 북, 동과 서, 흑과 백, 좌와 우, 남과 여…등등의 고질적 대립이 출구 없이 계속된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주목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앉아있는 양극의 공존이다. 티와 대들보가, 구속감과 자유의지, 좌와 우가 함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거나 짐짓 외면한다. 독일인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독일인들은 양극성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 알고 고백했기에 철학을 통해서 근본적 해결의 사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남의 일로만 여기기 때문에, 바깥에서만 맴돈다.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거의 모든 이들은 정치인들과 정부를 향한 원색적, 물리적 요구만 거세게 할 뿐 그 극복을 위한 근본적 고민은 잘 안 한다.

작가나 학자들조차 문제의 본질적 연구 대신에 정치인만 질타하기 일쑤다. 그 옛날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나 이기이원론 수준의 논의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최근 중도실용론마저 정치 쪽에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지성인들은 느끼는 바 있음 직하다. 정치인 우위 현실이 씁쓰름하지 않은가.

예술가나 철학자를 포함, 우리 모두 이제 자기 안에 있는 두 양극성을 우선 똑똑히 직시해야 하고, 그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극복과 통일·화해라는 내면의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입으로는 교육의 평등성을 주장하면서 자기 자녀만큼은 수월한 교육을 위한 사교육과 유학에 매달리는 고질적인 이중플레이는 대표적인 거짓이며 가짜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고, 남을 향한 도덕적 비방을 하는 행위야말로 비겁하다. 실천과 현실은 반대인데 번지르르한 도덕의 입술로 인하여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말하자면 자기정체성이 실종된다. 입으로는 백을 말하면서 몸으로는 흑을, 입으로는 흑을 말하면서 몸으로는 백을 행하는 거짓의 명목주의는 서로 다른 해괴한 모습으로 몸이 분열된 그리스 신화의 저 메두사를 방불케 한다.

  • 마이홈트위터로 보내기MSN 메신저 보내기뉴스알림신청뉴스레터뉴스젯RSS
  • 위로맨위로
  • 기사목록
  • 블로그담기
  • 스크랩하기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