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화

그저 책이 좋아 모이죠, 그렇게 39년 흘렀네요 [중앙일보] 기사

푸른물 2009. 7. 30. 11:56

그저 책이 좋아 모이죠, 그렇게 39년 흘렀네요 [중앙일보]

독서모임 ‘고전과 명작’

“같은 책이 여러 종류 있으면 무조건 활자 큰 책으로 사지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서모임의 유력한 후보인 ‘고전과 명작’ 회원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4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 주계순씨다. ‘고전과 명작’은 본지 독서캠페인에 응모해 증정책 30권을 받은 북클럽이기도 하다. [박종근 기자]

잔 글씨로 된 책은 눈물이 나서 도무지 읽기가 어렵다는 한방택(76) 씨는 독서모임 ‘고전과 명작’(회장 주계순)의 터줏대감 회원이다. 서울 사직동 종로도서관을 활동 근거로 하는 이 독서모임은 올해로 결성 39년째. 정확한 통계가 없어 공인 받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대한민국 최고(最古) 독서모임 아닐까. 회원들도 대부분 50~60대로 70대도 4명이나 있다. 막내라 해도 40대 중반이다. 절반 이상이 10년 넘게 ‘개근’한 독서광들이란다.

21일 오전 11시 종로도서관 3층 문화교실을 찾았다. 회원 11명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에 관해 토론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1970년 ‘대한어머니회’의 특별활동모임으로 시작했어요.”

창립회원 중 한 명인 정해순(73)씨에 따르면 처음엔 모임 이름도 따로 없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울 당산동 대한어머니회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대한어머니회관이 옮겨 가면서 80년대 ‘명동시대’를 맞아 이름이 생겼다. YWCA 산하에서 ‘문맥회’란 동아리로 활동했다. “특별히 규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입과 탈퇴도 자유로운 편이어서 회원들 수는 들쭉날쭉 했어요. 가장 많을 때가 20명 정도였나.” 정 씨의 기억이다.

지금의 ‘고전과 명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94년,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사단법인 ‘독서아카데미’ 소속으로 옮기면서부터였다. 95년 9월부터는 종로도서관에서 모임을 열고 있으니 그동안 운영이 순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자생적으로 생겨 자율적으로 운영하다 보니 회원들 면모나 참여 계기도 다양하다. 한방택씨는 99년 교직을 떠난 뒤 우연히 참여하게 됐고, 역시 교사 출신인 이정희(72) 씨는 초등학교 동창인 정해순씨 권유로 들어왔다. 고령자가 많으니 퇴직자나 주부가 주류지만 여행업자나 영어강사, 수필가도 있다. 공통점은 단 하나,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월 첫째· 셋째 화요일 만난다. 그간 읽은 독서목록을 보니 콘래드 소설 『암흑의 해심』, 박범신의 『촐라체』 등 국내외 명작은 물론 『헌법의 풍경』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까지 폭도 넓고 수준도 높다. 대학생에게도 만만치 않은 책들이라 노년에 왜 사서 고생일까 싶지만 이들은 입을 모아 독서예찬론을 폈다.

“떠들고 노는 모임보다 마음의 양식도 얻고, 손주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니 교육도 되고…”(주계순 회장), “등산· 낚시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해봤는데 독서만한 것이 없다. 치매 걸릴 염려도 없고.”(한방택)

토론 진행을 맡는 마스터 이영미씨가 “『롤리타』는 뉴스위크에서 ‘100대 명작’으로 선정한 만큼 외설이니 뭐니 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나름대로 문학성을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골랐다”고 설명하면서 정해진 순서가 시작됐다. 작품소개, 소감이 오가더니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싶다면 뭐라 할 것이냐”는 어느 회원의 질문을 계기로 예술과 도덕의 관계로 화제가 옮겨갔다.

머리 희끗희끗한 보통사람들이 소아성애를 다룬 문제작을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신기해 보였다.

김성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