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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중앙동(옛 봉천동)에 가면 2008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조경란(40)의 집필실이 있다. 7~8평 규모지만 약 2만권의 책이 질서정연하게 책꽂이에 자리 잡고 있다. 작가가 작업하는 책상과 소파 베드를 뺀 나머지 공간은 전부 책이 차지하고 있다. 책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시집이 모여 있고, 소설책들은 작가별로 꼼꼼하게 분류돼 있다. "책꽂이에 있는 것은 다 읽은 책들"이라고 한 작가는 "안 읽은 책은 꽂아놓지 않고 바닥에 쌓아둔다"고 말했다. 현재 바닥에는 두꺼운 서양철학서들이 대기 중이다.
책꽂이에는 다양한 코끼리 인형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다. 프랑스·멕시코 등등 멀리 바다 건너온 것들이다. 조경란은 자전소설 〈코끼리를 찾아서〉를 발표한 뒤 코끼리 인형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단편소설부터 내 작품이 외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처럼 '코끼리'는 그냥 보기만 해도 좋다. 크고 듬직하며 기대서 울 수도 있고 무슨 말이든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코끼리.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코끼리. 나를 어디 먼 데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코끼리."
봉천동은 서울토박이 작가 조경란의 고향이다. 단편 〈나는 봉천동에 산다〉도 발표한 그는 "이름처럼 하늘을 떠받들며 하늘에서 가까운 동네"라며 "달도 태양도 이웃인 그런 동네, 도시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는 동네"라고 애향심(愛鄕心)을 발휘했다.
문학동네 작가상(1996)·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2)·현대문학상(2003)을 받은 조경란은 3전4기 끝에 지난해 소설집 《풍선을 샀어》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조경란의 소설은 시적인 문체로 스토리보다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현대인의 내밀한 욕망을 독특하게 그려낸다.
여성 요리사의 지독한 사랑을 화려한 요리의 언어로 묘사한 조경란의 장편 《혀》는 지난해 출간 이후 2만부 이상 찍은 데 이어 영어 등 8개 국어로 판권이 팔렸고, 최근 영어판과 독일어판이 나왔다. 작가는 "독일 출판사가 저를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교해 소개하기에, '영광이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혀》에 대해 "식욕과 성욕은 다른 것인데, 이 소설은 그 둘을 동일시하고, 결말이 황당하다"고 한 평론가는 비판했다. 작가는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볼 수도 있고, 각각 다른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말했다.
작가의 책상에서 국어·영어사전 외의 단행본은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이 유일하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시절 시인 지망생이던 조경란은 "이 책은 언어를 고르며 다루는 법을 말해준다. 결코 먼 곳에 꽂아둘 수 없다"고 말했다. "26살의 내가 문창과에 입학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맨 처음 산 책이다. 문학을 시작하기 전, 나의 첫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작업실에는 드로잉을 위해 나무로 만든 손 모형(模型)도 있다. 연필을 쥔 손 모형이다. "내 손을 보고, 누군가 그러더라. 도시처녀인 척 하는 시골처녀의 손이라고. 속으로 뜨끔했다."
벽에는 서예가 송하경의 '묵'(默)이란 글씨가 걸려 있다. "'묵'이야말로 일생의 가장 큰 화두라고 생각한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하지만 거의 매년 책을 펴냈을 정도로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작가는 올여름 중국과 티베트 여행을 갔다 온 뒤 새 장편 집필에 들어간다. "작가가 된 이후 머릿속에서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주제인 '죽음'에 관한 소설이다. 뭐랄까, 삶이 죽음을 이기는 소설"이라고 한 작가는 끝내 제목을 비밀에 부쳤다.